여행 삼일 전에 비행기 예약하기

갑자기 떠나고 싶어서

by narae

살아있는 것 같아. 심장이 뛰는 것 같아. 다시 태어난 것 같아. 몸에서 열이나. 너무 좋다.


우리는 사가라는 곳을 이벤트 특가로 처음 알게 되었고 화요일에 항공권을 예약하고 그 주 금요일 아침 비행기로 사가에 갔다. 둘 다 제이면서 도망가듯 비행기부터 잡았고 전날에 숙소 예약을 하고 이심을 사고 공항에 가서 환전을 했다. 나는 배낭하나, 친구는 작은 기내용 캐리어 하나 들고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


사가에 가까워지는 순간부터 노랗고 네모난 논밭들이 귀엽게 펼쳐진다. 여기는 사가, 지금 너에게 보여준 이 귀여운 논밭처럼 작고 소박한 동네란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교통사고처럼 착륙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새벽부터 준비하고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깨어난 정신으로 여행하라는 뜻 같아서 오히려 재밌었다.


사가 공항에서 사가역까지는 30분이 걸리는 작은 마을. 숙소에 짐을 놓고 사가 성터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한국과 다른 정갈한 상점들과, 거리에 있는 많은 나무들, 보이는 족족 들어가 버린 편의점 때문에 목적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큰 나무 아래 의자에 쉬었다가,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듣다가, 최근에 봤던 웃긴 릴스를 같이 보다가 다시 일어나 목적지로 걸어갔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간 여행이라 그런 건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그냥 철퍼덕 앉거나 신발을 벗고 잔디밭에 들어가는, 자유로운 여행이 되었다.


편의점에서 발견한 작은 디저트 하나에도, 마트에서 식재료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그 나라의 풍경을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친구와 함께 가서, 나도 같이 웃었다.


온천이 유명하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일정은 온천을 중심으로 움직이기로 했는데 그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온탕-사우나-냉탕을 미친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현기증이 안 난 게 신기할 정도. 약탕 같은 곳도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내 몸이 좋아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마치 빈틈없이 나를 안아주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 같아. 심장이 뛰는 것 같아. 다시 태어난 것 같아. 몸에서 열이나. 너무 좋다.


우리가 온천에서 했던 말들이다. 우리는 이런 작은 것들에도 행복해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는 살아있지만 죽어있었고, 숨 쉬고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조여지는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고, 하지만, 살아가야 하기에 눈을 똑바로 뜨고 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스스로를 조일수록 고통스러웠던 것은 보이지 않는 나 스스로였고 그게 이번 즉흥적인 여행으로 터져 나왔다. 방 안을 감도는 조용한 외로움이 아닌, 조용한 휴식. 참아야만 하는 날들이 아니라 원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하루. 좋아하는 나무와 공원을 맘껏 바라보며 걷는 산책. 새로운 것을 먹어보는 즐거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온천. 깨끗하고 구경할 것이 널려있고, 친절한 사람들의 나라.


그것들을 온전히 나에게 주어서 더 좋았다. 나도 그런 것들을 받고 싶었겠지. 도피나 도망이 아닌 휴식의 신호. 검열이 아니라 내가 숨쉬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나보다 깊은 곳에 있는 내가 먼저 알아차린 것이다. 살고 싶어서, 애쓰고 싶지 않아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에게 보여준 작은 마을에게, 함께 떠나자고 한 친구에게 고맙다. 언제나 여행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슬쩍 내 쪽으로 내밀어준다. 그러면 나는 아이처럼 그것들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천진하게 웃는다.


천천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알잖아. 두 손으로 받아 든 선물을 들고 좋아하기만 하면 돼. 부드럽게 숨 쉬면 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조용하고 따뜻하게 나를 대해 주면 돼, 하고 이번 여행이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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