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타내는 말은 무엇인가?
4년 간 다닌 회사를 퇴사하면서 '나'를 표현할 수식어 하나가 사라졌다. 대부분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을 정도로 직장인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과 다니는 회사의 존재감이란 어마어마한 것인데, 회사를 그만뒀더니 나를 무엇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마 8살 이후 처음으로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순간들일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OO학교 학생이었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직장인이 되었으며 거의 8년 가까이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나'의 라벨을 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입국신고서 직업 란에도 무엇을 써야할까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동안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직장인'의 힘이 꽤나 막강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연회비 10만원 넘는 신용카드를 받으려면 최근 3개월 급여이체 내역을 카드사에 보내줘야하고, 마이너스통장을 만들려면 최근 2년 간 원천징수영수증을 들고 가야한다.
퇴사하시면 마이너스통장 사용한 건 한 번에 상환해 주셔야해요.
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들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 회사를 계속 다닐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직장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니 대출이 안 나오는게 당연하지만 뭐라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할 것 같은 이 기분. 게다가 그간 신경 써 본 적도 없는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도 '지역가입자'라는 이름 아래 바뀌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 올해 회사 다닌 게 있으니 내년 5월에는 나 스스로 연말정산도 해야한다. 회사에서 해 주던 모든 게 한꺼번에 다 셀프가 됐다. 세상에나...
여튼 나는 지난 금요일 완전히 퇴사처리됐고, 나는 뭐하는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직'이라는 표현은 괜시리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것 말고 좀 더 나은 표현은 없을까. 캐나다 여행갈 때 신청했던 eTA 페이지에는 'Homemaker'라는 항목이 있었다. 기존의 'Housewife' 보다 여성차별적인 표현은 사라지고 말 그대로 '가정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남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Homemaker
: a person who manages a home and often raises children instead of earning money from a job
내가 남편과 함께 호치민에 간다고 했을 때 두 번째로 많이 들은 말이 '가서 뭐 할거야?' 였다. 아마 어떤 경제활동을 할 것이냐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거다. 나도 일하는 걸 좋아하고 집에 있으면 좀이 쑤시는 타입인 걸 주변 사람들이 워낙 잘 알고 있으니 한 얘기겠지만, 지금 당장은 나도 할 이야기가 딱히 없다.
당분간은 'Homemaking'을 하려고 한다. 나는 직장 생활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져야하고, 남편은 새로운 곳에서 일하는 데에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 모두 한국에 있고 우리 부부와 고양이 도미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집 안에 집기를 채워넣고 아침저녁 밥을 차리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 펼쳐질 것이다.
그 후에는 현지 언어를 배우고 차근차근 생활에 익숙해지다보면 자연스레 일할 기회도 찾아오지 않을까. 경단녀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1년 정도는 조급해 하지 말고 차근차근 지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