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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Jun 20. 2019

베트남 살다 보면 생기는 흔한 환장 에피소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서 살았다는 점을 고백한다. 그때는 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여기 와서 예상치 못하게 내 앞에 펼쳐지는 환장 of 환장인 상황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1년 간 베트남에 살면서 내게 찾아온 몇 가지 환장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이제는 이런 일들이 일상이라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내 몸속 깊숙이 자리 잡은 한국인의 DNA가 나를 가만두지 않아 괴롭다. 사실 별일 아닌 것들인데도 오히려 '별일 아닌 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기분 마치 강물을 헤치고 가는 느낌... (feat. 우기의 타오디엔)


아마 해외생활하는 한국사람들이라면 대체로 비슷할 텐데, 대체로 짜 맞춘 듯 한 치의 오차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매끄럽게 일처리가 이뤄지는 한국에서의 삶에 젖어있다가 외국에 나오면 온통 삐걱대는 프로세스에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다. 게다가 베트남은 인력 턴오버가 심해서 대기업, 글로벌 브랜드라고 해도 마치 스타트업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우리 부부는 베트남에 살면 나라 전체가 스타트업 같다는 말을 종종 한다.


#1. 취소 못하는 영화표 feat. CGV


와 대한민국 만세!

베트남에서 가장 점유율이 높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CGV다. 듣기로 로컬 멀티플렉스를 인수한 뒤 베트남 국내 1위 영화관이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우리나라 서비스처럼 모바일 앱이 있고, 영화 예매도 가능하다. 온라인 쇼핑과 다른 점은 반드시 결제를 해야만 예매가 된다는 점. 하긴 예약만 해놓고 안 나타날 수 있으니 영화관은 결제가 필수일 듯하다. 이 점은 한국에서도 워낙 익숙해서 큰 어려움 없이 카드 정보 넣고 영화표를 예매했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화 시간표 UI와 티켓

그러다 일정을 바꾸고 싶어서 앱에 들어갔는데 여기 어딘가 붙어있어야 할 취소 버튼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음? 뭔가 어색한데 이 휑한 화면은 뭐지... 어디 조그맣게 만들어놓은 건 아닐까 내 손 안의 스마트폰 화면을 두 눈 크게 뜨고 샅샅이 뒤져보아도 취소 기능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어색하다...?


혹시나 싶어 FAQ 메뉴에 들어갔더니 ‘취소 기능은 지원하지 않는다’는 이 당당함. 지금 보니까 예매 완료 후에 나오는 티켓 화면 제일 하단에 깨알 같은 글씨로 환불/교환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고객센터나 극장에 전화하면 취소가 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 거 같았다. 


결국 나는 저 영화 일정을 지키기 위해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영화관을 가야만 했다.


내가 전직 서비스 기획자였어서 그런 걸까, 이 취소 기능 없는 온라인 예매 서비스는 정말이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까지 나는 예약/결제와 취소는 당연히 한 세트라고 생각했고 취소가 안 되는 서비스는 뭔가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하물며 취소가 안 되는 예약이라면 예약할 때 팝업이라도 띄워줘야 하는 거 아닌가? (분노)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취소 기능을 넣지 않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돈 주고 산 다음 알려줘 봐야 무슨 소용이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CGV에 메일을 두 번이나 보내서 ‘카드 결제 취소가 불가능한 것이냐, 못하는 것이냐, 아니면 법적인 규제가 있는 건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물었는데 정확한 답변은 얻지 못했고 그저 미안하다는 얘기뿐이었다. 심지어 내가 FAQ에서 이미 취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첫 번째 메일에서 미안하지만 온라인 예매는 취소가 안된다고 또 반복해서 얘기하길래 두 번째 메일은 내가 그 얘기 들으려고 메일을 쓴 게 아니라고, 사실을 정확히 설명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답을 받지 못했다.


(덧) 카드결제 취소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불가능한 건 아닌 듯한데 절차가 복잡해서 그냥 안 해주는 것 같은 느낌. 카드로 사면 백화점 매장에서도 취소는 못해준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는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현금으로 받은 적도 있다. 그러니 베트남에서 카드결제는 신중하게...


#2. 주차비 정산 못하는 관리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 중 하나다. 최근 지어졌고, 싱가포르 개발사에서 지은 곳이며, 매니지먼트도 꽤 유명한 회사에서 하고 있다. 리셉션 담당자들은 영어가 유창하고 매우 친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환장하게 한 일이 하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는 아니지만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이것으로...) 


얼마 전 우리는 오토바이를 한 달 빌렸고, 주차비를 지불하기 위해 리셉션에 주차 등록을 했다. 그러던 중 관리비를 내야 할 시점이 돌아왔고 관리비에는 자동적으로 주차비 3개월 분이 함께 청구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토바이를 탈 생각이었어서 주차비를 냈다가 우리는 계획을 바꿔서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주차비를 환불받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트남에서 환불받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일 줄 몰랐다.

 

자 정답 맞히시는 분께 선물을...
첫 방문: 4월 13일

처음에 방문해서 상황 설명을 하고 주차비 환불받고 싶다고 하자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에게 잘못된 금액을 알려주었다. 내가 분노를 잠시 가라앉히고 그 금액이 아니라고 하자 나를 20분 기다리라고 하더니 내부에서 상의(??)를 해야 한다며 다음 주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문: 4월 22일

다음 주에 찾아갔더니 내게 빈 종이 하나를 내밀고 환불 신청서를 자필로 쓰라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신청을 했는데 언제 환불신청을 한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문서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분명 취소 신청했는데 왜... 그래도 시키는 대로 계좌번호까지 같이 적어서 냈더니 연휴가 껴 있어서 다음 달에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신청한 카드 보증금은 보증금이 아니고 카드값(?!)이라는 걸 알았다. 


환불 안 되는 주차카드, 20만 동(약 1만 원) 짜리...


세 번째 방문: 5월 31일

그렇게 나는 베트남 스타일대로 5월을 꼬박 기다렸다가 5월의 마지막 날 관리실을 또 찾아갔다. 나 기억하지?로 말을 꺼내고 주차비 왜 환불 안되냐고 했더니 ‘미안 내가 너무 바빠서 못 보냈다’고 말하는 쿨함. 나는 그녀에게서 밀레니얼 세대에서나 느낄 법한 쿨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왜 한 달을 기다린 걸까. 종이에 자필 신청서(?)는 왜 쓴 거고 그때는 왜 안 된 걸까... 내 머리가 뜨끈해지면서 분노 임계치가 넘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쿨한 그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 속에 떠오른 문장 하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다시 순순히 작은 종이에 사인을 하고 현금을 받고 나서야 이 지루한 주차비 싸움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 후 나는 말로만 얘기해 주는 건 믿지 않고 최대한 문서를 보관하려고 하고, 모든 문서는 쓰고 나서 사진을 찍는 습관이 생겼다. 


#3. 헤드셋 없이 비행기 타기, 불러도 오지 않는 승무원

지난달 나는 싱가포르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베트남의 국적기인 베트남항공을 타고 갔다 왔다. 비행시간은 1시간 남짓으로 길지는 않지만 나름 국제선이었다는 점... 여하튼 싱가포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이상하게 헤드셋이 없었다. 나는 유선 이어폰 안 쓴 지 오래라 헤드셋을 요청하려고 주변을 살펴봤는데 아무도 헤드셋을 쓰지 않은 걸 보니 아예 비행기 안에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헤드셋 요청도 할 겸, 기내가 너무 추워서 담요도 달라고 할 겸 승무원 호출 벨을 눌렀는데 3번 넘게 눌러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승무원 호출을 여러 번 눌렀는데 (조용한 비행기에 울려 퍼지는 띵동 띵동 호출벨 소리...) 그 누구도 승무원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 더 놀라운 건 승무원들이 복도를 지나다니기는 했는데 그냥 휑하니 가버려서 붙잡을 수도 없었다. 


결국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헤드셋 없이 개인 모니터를 시청했고 추위에 떨다가 호치민에 도착했다. 


#4. 갈 때마다 tax invoice 종이 없는 병원


이건 내 경험담은 아니고 남편 매니저님께 들은 얘기다. 여기서 병원을 가면 대부분 보험 청구를 하는데 한국에서 장기 체류 보험을 들고 온 사람들은 간단하게 병명이 나온 병원 영수증만 있으면 바로 청구 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베트남 보험사에 청구를 해야 해서 준비해야 할 서류가 꽤 많은 편이다. 기본적인 진단서부터 처방전, 그리고 흔히 베트남에서 '레드빌'이라고 하는 그 tax invoice가 꼭 있어야 한다. (왜 레드빌이냐면 종이가 핑크색임) 


대략 이런 느낌

이 레드빌은 종이 재질이 독특한데 우리가 흔히 카드 결제하고 받는 영수증 생각하면 된다. 종이 두 개가 겹쳐져 있고 위에 글씨를 쓰면 중간에 먹지가 있어서 밑에 있는 핑크색 종이에 똑같은 글씨가 쓰이는 그런 개념이다. 


여하튼 보험 청구하려면 이 레드빌이 있어야 하는데 매니저님은 갈 때마다 병원에서 이 종이가 없으니 다음에 받으러 오라고 했다. 한두 번이야 그냥 지나갔는데 몇 번을 그렇게 얘기하니 또다시 분노가... 심지어 따로 병원에 찾아가서 서류를 받아왔는데 또 빠진 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참다못해 서류 이메일로 보내주면 안 되냐고 했더니 또 그건 안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험 청구를 위한 tax invoice를 발행할 텐데 종이가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싶다. 한 번은 정말 부득이하게 없을 수 있는데 계속 그러는 것도 문제... 무려 이 병원은 로컬 병원도 아니고 외국인들이 많이 가는 국제 클리닉에 병원비도 엄청 비싼 곳이다. 매니저님은 이 비효율에 지쳐서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을 듯. 


나는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병원에 갔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위에서 말한 tax invoice 때문인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저 인보이스 발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 그마저도 나한테 미리 말을 안 해줘서 보험사에 불완전한 서류로 청구했다가 추가 서류 제출 요청받고 얘기해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마 베트남의 각종 허가 프로세스를 거치다 보니 예정일은 자꾸 늦어지고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처음에는 기다리다가 결국 병원 다녀오고 2달이 지날 때까지 tax invoice를 받지 못해서 보험 청구를 포기하고 병원비를 환불받았다. 이건 한국인 의사 선생님이 있는 병원이고 직원도 한국인이라 가능했던 것 같고 만약 로컬 병원이었으면 택도 없었을 듯. 



그 외에도 나는 매일 조금씩의 환장 상황을 겪고 있다. 그랩 기사가 내 위치를 못 찾는다거나, 카페에서 내 주문을 잘못 받았다거나... 이런 일은 거의 매일 일어나서 이제는 체념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제 나의 분노 주기가 정착 초반에는 일 단위였다면 (이 단계에서 다들 지쳐하며 향수병에 걸리곤 한다. 나도 그랬고) 이제는 주/월 단위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 점점 내 마음속의 인내심 통이 커지는 걸 느끼고 있다. (= 많이 체념했다는 뜻)


내 마음속에 있는 인내심 통은 매번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데, 통이 텅 비어있을 때는 정도가 큰 스트레스가 와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컵이 거의 가득 찬 상황에서 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치는 것처럼 임계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아주 작은 스트레스만 와도 펑하고 터져버리는 기분이다. 그럴 때는 이제 나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 (....) 


푸른 하늘을 보며 마인드 컨트롤 (습습후후)

물론 한국에서의 삶이 100% 정답이라는 건 아니다. 살다 보면 늘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 가진 채로 시작할 수도 없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는', 그리고 '과도하게 미안해하지 않는' 이들의 마인드에서 어느 정도는 배울 점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게 나를 피곤하게 할 때도 있지만)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 커피


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환장 에피소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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