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정리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호치민이 주재원(*덧: expat은 보통 '국외 거주자'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재외국민'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주재원'은 본국에서 외국에 파견 보낸 근로자를 뜻한 말이라 expat이랑은 또 다른 거 같지만 마땅한 말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들에게 인기 좋은 도시라는 기사를 봤다. (Saigon becomes a top expat destination) 이 기사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호치민은 한국인이 살기에도 좋은 곳이다. 아직 거주 5개월 차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까지 내가 느낀 점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 봤다.
1) 저렴한 물가와 생활비
이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장 먼저 꼽는 장점이다. 동남아시아 다른 도시에 비해서도 물가가 저렴한 편이라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 대신 한국인들은 고액 월세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거비에 가장 먼저 놀라는데 몇 억 대의 보증금이 없는 대신 월세만 지불하면 되고, 그 덕에 한국보다는 자유롭게 이사를 다닐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이사할 때마다 보증금 스트레스는 훨씬 덜해서 이건 좋았다.
생활 물가는 본인의 생활 패턴이 어떤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로컬 식당에서 밥 먹으면 2천 원에도 밥 먹을 수 있고 한식당에서 밥 먹으면 한국과 큰 차이 없다고 보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호치민 생활비가 생각보다 많이 든다, 한국과 별 차이 없다고 하는데 이 삶의 질을 서울 한복판에서 유지하려면 최소 2배 이상은 지불해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호치민의 생활 물가는 저렴한 편이다. (서울 시내와 멀지 않은 곳에 살지만 매일 택시 타고, 집안일은 메이드가 하고, 매주 마사지받고, 주 3회 이상 외식하고, 고급 마켓에서 장 본다고 생각해봅시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베트남어를 배워서 로컬 시장 가서 장 보면 5천 원어치만 장 봐도 한 가득 사 올 수 있을 것이고, 이 모든 게 귀찮으니 아파트 근처에 크고 깔끔한 마트에 바코드 붙은 가격으로 사 오겠다 하면 2-3만 원은 순식간이다. 대략 내가 경험한 호치민의 생활 물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주의
철저히 내가 경험한 것만 적어둔 것이고 퀄리티에 따라 가격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진다. 같은 길 위에 가격이 10배 차이나는 식당이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도 좋은 건 비싸고, 로컬처럼 생활하면 몇 가지는 아예 비용이 들지 않거나 여기 적어둔 것 절반 이하로 생활 가능하다. 아래 적어둔 건 '평균 생활비'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물가'라고 보면 된다.
월세 (2 베드룸, 풀옵션 기준, 위치/연식/인테리어 퀄리티에 따라 천차만별) : 약 110 ~ 150만 원 (노옵션은 100만원 선)
택시비 (비나선, 7인승 기준) : 기본요금 약 600원 (500m), 거리요금 1km 당 약 800원
외식 (영어 메뉴 있고 에어컨 나오는, 외국인들 많이 가는 레스토랑 기준) : 단품 메뉴 약 5천 원 ~ 8천 원
커피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 약 2,500원
통신비 (데이터 5GB / 1달) : 약 4,500원
마사지 (90분) : 약 2만 5천 원
메이드 시급 (주 2회 기준, 요리 포함) : 시간당 약 5천 원
급여를 어느 나라 기준으로 받느냐, 어떤 통화(달러, 동화, 원화 등)로 받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물가가 저렴한 만큼 버는 돈도 줄어드니 베트남 회사에서 베트남 사람들과 동등한 기준의 급여를 받는다면 아주 여유 있는 생활은 어려울 수도 있다. 반대로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의 회사에 소속되어 그 나라 물가 기준으로 급여를 받고 호치민에 파견 오면 경제적으로 꽤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점.
2) 한국과 가깝고 한국인에게 우호적이다
이건 내가 최근에 느낀 장점이다. 일단 항공편이 매일, 여러 항공사에서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한국에 갈 수 있다. 시간도 5시간 정도 걸리니 아침 일찍 출발하면 한국에 가서 다음 끼니를 먹을 수도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 덕에 한국 물건을 구하는 것도 아주 쉬운 편이다. 우리가 평소 마트에서 보던 물건 대부분은 한국 마트에서 구할 수 있고, 한국의 대형 마트 (이마트, 롯데마트)도 있어서 어렵지 않게 한국 물건을 살 수 있다. 마트에도 없는 물건이라면 핸드캐리 서비스로 하루 만에 배송받을 수도 있다. (대신 배송료가 비쌈)
호치민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무려 10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 덕에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도 매우 활발해서 베트남어를 못해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심지어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가면 종업원들이 한국어로 응대해 준다. 기본적인 생활은 한국인 대상 서비스만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고 교민들이 많으니 커뮤니티를 구축하기도 쉽다. (대신 영어를 하면 접하는 더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요즘 K-POP을 비롯해 축구 열풍, 한국 브랜드의 인기 등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것도 교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 시내 한가운데서 방탄소년단 멤버 생일 축하 광고 메시지 (당연히 한글로 되어있음)를 보고, 식당에 가면 블랙핑크 노래가 나오고, 박항서 감독이 모델인 광고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보통 해외에 살면 스스로 이방인으로 느껴져서 위축되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하고) 여기에서는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일이 많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베트남인들이 많아서 언어교환도 쉽게 할 수 있는 편!
3) 연중 일정한 날씨
내가 호치민에서 가장 만족하는 건 일 년 내내 기온이 거의 일정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추위를 많이 타고 환절기마다 비염에 감기를 달고 살아서 한국의 겨울이 너무 싫었다. 게다가 요즘에는 한겨울에도 미세먼지가 심해서 대한민국의 4계절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호치민에는 계절의 변화는 없지만 우기와 건기가 있고, 우기에는 매일 스콜이 찾아온다. 대신 스콜이 지나면 금방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파랗게 개고, 생각보다 습하거나 덥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사 온 7월에는 호치민보다 서울이 더 더웠다.
한국에서는 극단적인 날씨 탓에 계절 가전 (에어컨, 히터, 제습기, 가습기, 공기청정기, 건조기, 스타일러...)이 집을 많이 차지하는데 여기에서는 에어컨은 다 천장에 붙어있고 제습이나 가습이 필요할 정도로 습도가 문제 된 적은 없었다. 공기의 질은 오토바이 때문에 길가에 매연이 있기는 해도 모래 먼지가 도시를 뒤덮는 일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 여름옷들은 옷장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서 옷장을 더 넓게 쓸 수 있고, 상대적으로 겨울 옷보다 저렴해서 옷에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된다.
(수정) 미세먼지 심하지 않다는 표현은 수정합니다. 미세먼지에 대해 댓글이 많이 달렸는데 우기에는 맑던 하늘이 본격적으로 건기에 접어드니 미세먼지가 심해지더라고요. 최근 3일간 미세먼지 농도가 꽤 높았고 오늘은 조금 나아졌어요. 제 경험이 짧았던 탓이라 생각하고 문장 일부 수정합니다. (그래도 기온이 일정한 건 변함없으니 3번 단락을 아예 빼지는 않는 걸로.)
이번 기회에 살펴보니 전 세계에서 공기가 맑으면서도 기온이 온화한 지역이 몇 남지 않았더라고요. 공기 맑기로 유명한 캐나다나 북유럽은 겨울이 너무 길고... 그만큼 '살기 좋은 도시' 후보가 얼마 남지 않은거 같아서 씁쓸합니다.
위 3가지 장점 외에도 사업을 하거나 자녀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도시가 주는 장점도 크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체감하기는 어려운 것이라 패스....
또 이 도시가 외국인, 그리고 한국인이 살기에 좋은 건 맞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적응 안되고 불편한 점도 있다. 다음 포스팅은 그걸로 해 봐야겠다.
* 다음 포스팅 업로드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