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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26. 2019

생리대 만드는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남편 덕분에 생리대를 공부했다

남편 분 무슨 일 하세요?


해외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아무래도 다들 이 나라에 어떻게 왔는지 궁금할 테니까, 내가 '남편 일 때문에 같이 왔다'라고 하면 바로 나오는 질문. 그럼 나는 바로 "생리대 만들어요"라고 하는데 그때 사람들의 반응이 꽤 흥미롭다. 


일단 내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생리대는 사면 검은 봉투에 넣어주는, 화장실 갈 때 꼬깃꼬깃 숨겨서 가야 하는 물건인 만큼 내가 초면인 사람에게 '생리대'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살짝 놀라는 게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평생 생리대를 써 볼 일 없는 남자가 거의 10년 가까이, 생리대 만드는 일만 해왔다는 것 또한 신기하게 받아들여진다. 


최근 남편을 소개할 일이 많아서 얘기하다가 나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듯해서 기록 차원으로 글을 남겨 둔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생리대에 시선 고정

마트에 장 보러 갈 때, 여행 가서 편의점이나 드럭스토어 갈 때면 남편은 항상 생리대 코너를 꼭 빠지지 않고 살펴본다. 본인이 만든 제품이 어떤 위치인지, 다른 회사 제품들은 어떤 게 있는지 살펴보는 것. (일의 연장선!) 해외에서 신기한 생리대 한 두 개쯤은 직접 사 오기도. 남자가 매대에서 생리대 뒷면 뒤적뒤적하고 있는 광경이 처음에는 생경했지만 이제는 아주 익숙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아직...)


핀란드 생리대
대만 생리대
베트남 생리대

내 사진첩에 마트 사진은 90% 이상이 생리대 사진이다. (....)


남편한테서 들은 전 세계 생리대 이야기

남편은 베트남에 오기 전에 글로벌 연구소에서 일했는데, 그 덕분에 전 세계 여자들의 '생리대'에 대한 정보를 매우 디테일하게 알고 있었다. 정작 나는 한국 여자들이 생리대에 대해 무슨 생각하는 지도 잘 모르는데... 그중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몇 가지 공유하자면, 


1920년대 일회용 생리대 광고 (Kimberly-Clark, KOTEX)
T팬티용 팬티라이너 (P&G, Always)
진짜 쿨한 건가 싶은 쿨패드 (Unicharm, SOFY)


<세상은 넓고 생리대 취향은 다양하다>

세계 최초의 일회용 생리대는 1차 세계대전 중 간호사들이 붕대를 생리대로 사용한 것이 시초다

인도에서는 자주 갈지 않아도 되는 두꺼운 제품이 인기 (화장실을 자주 가지 못해서...라는)

특정 종교에서는 여성의 피를 불결하다 생각해서 일회용 생리대를 버릴 때 씻어서 버려야 한다, 따라서 피가 잘 씻기는 제품이 잘 팔림(!) 

남미 지역에서는 T-팬티를 입는 경우가 많아서 T-팬티용 팬티라이너도 있음(...!)

최근 동남아 지역에서는 Cool패드가 출시됨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그럼 나를 포함한 한국 여자들은 어떤 생리대를 좋아할까?' 하고 고민해 봤는데 내가 이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하고 많이 해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보편적으로 '얇고, 흡수가 빠르고, 촉감이 부드러운' 걸 좋아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도 그냥 막연한 생각일 뿐. 참, 최근에는 발암물질 이슈가 한국을 휩쓸었던지라 '무해한' 것도 중요한 키워드일 테고. 



내가 처음 생리대를 쓴 건 10대 때고 그때는 엄마가 사 준 걸 썼었다. 그 후에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제품을 써 볼 수 있었는데 그냥 내가 이것저것 써 보면서 실험하고 안 맞는 건 탈락시키고 맞는 걸 주로 썼을 뿐.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걸 그냥 사서 썼던 것 같다. 


남편과 연애하고 난 뒤에야 생리대에 '필름 커버'와 '부직포(non-woven) 커버'가 있다는 걸 알았고 (설마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유기농, 친환경 같은 문구의 함정(?)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왜 이제까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빨간 피가 나오는 생리대 광고 (유한킴벌리, 화이트)

생리대 광고에서 파란 피를 보여주거나 하얀 옷을 입고 샤랄라 한 여자들만 나온 건 사회 분위기가 '생리', '생리대'를 쉬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광고에서도 '생리'를 언급하고 빨간 피를 표현한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자라나는 소녀들은 생리 중에도 상쾌하고 산뜻해야만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한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생리'와 '생리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제까지 샴푸나 화장품은 무실리콘이니, 유기자차니 무기자차니 하면서 뒷면에 성분표 꼼꼼히 보는데 생리대는 마케팅 문구에만 혹해서 샀던 것 아닌가 하면서 나 스스로 반성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회 분위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제조사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생리대 만드는 남자와 살면서 좋은 건 집에 생리대가 박스채로 쌓여있는 것 (만세!) 외에도 내 생활의 일부인 생리를 100%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생리대에 대한 품평은 아주 귀 기울여서 들어주는데 나는 가장 가까운 사이의 제품 소비자로서 매우 자세히, 최선을 다해 생리대에 대해 피드백을 한다. 그게 내가 남편 일을 도와주는 방식 중 하나다. 그 덕에 나도 생리 전후 내 몸 컨디션을 좀 더 정확히 알고 내가 원하는 생리대 취향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일단 나는 필름 커버보다는 부직포 커버를 선호하고, 날개가 너무 크지 않은 제품을 좋아한다. (날개가 너무 크면 떼낼 때 찢어짐) 생리 양에 따라 제품을 바꿔서 쓰는데 요즘 라이너보다는 크고 생리대보다는 좀 작은 제품이 없어서 슬프다. 단종된 쁘띠윙 다시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최근 나온 입는 생리대(기저귀처럼 생긴 입는 생리대)는 세상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단종돼서 안타까운 화이트 쁘띠윙 (유한킴벌리)


언젠가 남편이 천하무적 완벽한 (=가볍고, 얇고, 부드럽고, 흡수가 잘 되고, 새지 않고...) 생리대를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겠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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