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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10. 2021

영국에서의 첫여름이 일주일 만에 지나갔다

내 생에 가장 짧은 여름

2월에 입국해서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영국의 여름. 이곳의 여름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유럽 여행의 성수기도 6-8월이라고 하지 않던가. 드디어 내가 영국의 여름을 만끽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여름이 지나가버렸다. 


에어컨이 없는 집


지금 사는 집을 처음 봤을 때 에어컨이 없어서 놀랐다. 24시간 365일 에어컨 켜야만 살 수 있는 베트남에 살다 와서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과연 에어컨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우리가 생각하는 '무더운 날씨'는 2주면 지나간다고 했다. 


31도에 폭염경보


6월까지만 해도 추적추적 비 내리고, 긴 옷은 항상 걸쳐야 하는 날씨였는데 7월 중순이 되니 갑자기 여름이 찾아왔다. 날씨 앱에는 낮 최고기온이 30도라고 해서 일 평균 기온 35도인 곳에서 살던 나는 자신만만하게 창문을 열었다가...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된다.


갑자기 찾아 온 여름

우리 집 거실 창문은 살짝 동쪽을 향해있는데 그래서인지 아침 해가 길게 들어온다. 문제는 이곳의 햇빛이 서울이나 베트남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 햇빛 알레르기가 왜 생기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아침에 해가 들어와서 실내가 슬금슬금 더워지면 밤이 되어도 그 열기가 안 빠졌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일단 블라인드 다 걷고 창문도 열어놨었는데 그랬더니 밤에 잠을 못 잘 지경이었던 것. 


더워서 냉면먹고 오전에는 블라인드 걷지 않기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건 낮 12시 이전에 블라인드를 걷지 않는 거였다. 마치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간 기분... 해의 방향을 보면서 해가 우리 집 창문 넘어갔다 싶으면 그때서야 블라인드를 열었다. 그리고 불 앞에 서는 것도 답답해서 요리도 안 하게 되고, 냉면같이 시원한 음식만 먹었다. 


또 이전에 소개한 대로 2달 만에 들어온 우리 집 소파는 패브릭 소재다. 뜨끈하게 데워진 집에서 저녁에 TV라도 볼라치면 푸근한 패브릭 소재가 영 답답하고 더웠다. 아마존에서 열심히 cooling mat를 찾았지만 사람용은 안 나오고 전부 개/고양이용만 나오길래 홧김에 나는 한국에서 택배를 받기로 했다. 소파에 까는 인견 패드를 위해서... (하지만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나의 택배, 아무래도 그 인견 패드는 내년에나 쓸 듯하다.) 


비가 오더니 여름이 끝났다


그렇게 딱 일주일. 내 어린 시절 여름방학처럼 선풍기 앞에서 빈둥거리고, 시원한 과일 꺼내 먹고, 창문 앞뒤 다 열어두고 맞바람 맞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 아마존에 이동식 에어컨을 살까말까 수십 번 검색하고, 에어컨 없이 문만 활짝 열어둔 카페에서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 마시는 게 지겹게 느껴지고, 길에 세워둔 우리 차에 뭐 커버라도 씌워야 되는 거 아닌가 했던 그 순간, 비가 한 번 오더니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벌써 시작된 가을

8월 초인 지금 창문 밖으로 패딩 입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고, 운전 연수받으러 아침 7시에 나오면 추워서 차에 잠깐 히터를 틀어야 할 정도다. 얼죽아는 진작에 탈퇴했고, 불과 3주 전 열일하던 선풍기는 전원 연결 안 한지 오래, 낑낑대며 물 빼둔 온수매트는 한 달 만에 곧 복귀를 앞두고 있다. 아, 올해 여름이 이렇게 지나가다니... 


비 맞으며 커피 마시기, 나무 밑에서 옹기종기 비 피하는 사람들

어제는 집 근처 공원에 나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도 당황하지 않고 큰 나무 밑에 잠시 서서 비를 피한다. 그러다 비 그치면 다시 나서고, 비가 너무 거센 것만 아니면 적당히 재킷 후드 뒤집어쓰고 가던 길 간다. 이게 말로만 듣던 British Summer 로군. 


영국에서 나는 보부상이 된다

Rainwear 가 있는 브랜드 RAINS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처하려니 짐이 늘어난다. 일단 아우터는 바람막이나 방수재킷으로 고정, 스웨이드 재질 신발은 절대 안 됨, 쌀쌀할 때 껴입을 가디건, 잠깐 해 비칠 때 필요한 선글라스, 작게 접히는 우산, 자전거 타고 다니려면 가방도 기본 방수는 되어야 하고 커버가 있으면 베스트. 


헌터 부츠, 여기서는 저렇게 생긴 신발을 Wellington Boots 또는 Wellies라고 부른다


예전에 한국에서 헌터부츠가 유행한 적 있었는데 여기 오니 그게 정말 왜 필요한 지 알게 됐다. 장화가 없으면 바닥이 딱딱한 하이킹 신발이라도... 비가 자주 내려서 땅이 금방 질퍽해지고 신발이 쉽게 망가진다. 베트남에 이어 또다시 나는 고급 소재의 신발이 필요 없는 곳에 오게 된 거다.



8월 안에 또다시 더위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예측이 있지만 7월 중순의 경험으로 봤을 때 그 더위도 아주 길지는 않을 듯하다. 이쯤 하니 에어컨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이 뭔지 알게 됐다. 


여기는 한국보다 8시간 느린 곳이지만, 가을은 훨씬 앞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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