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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으면서 둘러본 헬싱키

갈매기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by 앨리스

전날 무민월드를 보고 헬싱키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7시쯤. 우리가 선택한 에어비앤비는 헬싱키 중앙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였는데, 무거운 짐을 들고 걷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거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계단이 별로 없었다는 거.


20170620_194858.jpg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 안에 있던 에어비앤비

헬싱키의 에어비앤비는 투르쿠보다는 컸고 오슬로보다는 작았는데 나름 안에 있을 건 다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화장실이 너무 작았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첫날은 도착해서 저녁 먹고 잠든 것 외에는 한 일이 없고, 우리의 본격적인 여행은 둘째 날부터 시작됐다. 한 가지 독특했던 건, 우리는 이 날 생활한복을 입고 여행했다. 요즘 한복 입고 유럽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뭔가 헬싱키라는 도시에 잘 어울리는 복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그리 덥지도 않고 바람이 선선했으며, 의외로 북유럽 인테리어 디자인에 한복을 입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 우리가 한복 구입한 곳> http://leesle.com/



20170621_123530.jpg 헬싱키 중앙역 광장

대부분 유럽 여행의 시작은 중앙역이다. 왜냐하면 많은 대중교통 노선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고, 근처에서 도시 안내 자료나 지도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안에 워낙 많은 정보가 있다 보니 종이로 된 자료를 거의 보지 않는데, 헬싱키 지도에 무민이 그려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는 바로 중앙역으로 향했다. (역시 무민은 우리를 움직이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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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민이 그려진 지도와 한국어로 된 안내자료 두 개를 집어 들고 천천히 헬싱키 여행을 시작했다. 안내자료에 한국어 번역이 꽤 자연스럽게 되어 있어서 (예를 들면 '꿀팁' 같은 표현이라든지) 놀라웠다.


20170621_130522.jpg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아라비아 핀란드


우리가 제일 먼저 간 곳은 도심의 아라비아 핀란드였다. 원래 그릇에 많은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아라비아 핀란드에서 매년 무민 스페셜 에디션 머그를 출시해서 이 브랜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 하나둘씩 무민 머그를 사 모으다가... 이번에 헬싱키에서 산 머그를 포함해서 우리는 무민 머그를 5개나 보유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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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핀란드 독립 100주년이기도 해서 아라비아 핀란드에 100주년 기념 한정판 머그도 전시되어 있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마리메꼬, 이딸라에도 100주년 기념 제품이 있었는데 핀란드 국기의 십자가 색을 테마로 한 제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제품들이 우리의 소비 욕구를 자극했지만, 그릇을 짊어지고 한국까지 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물용 머그만 2개 사들고 아라비아 핀란드를 나섰다.


20170621_133223.jpg 푸른 하늘과 잘 어울리는 헬싱키 대성당

사진으로 다 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느긋하게 들어가서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면서 휘적휘적 헬싱키 도심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헬싱키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대성당을 만났다.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색 건물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스 신전 같은 기둥이 서 있지만, 서유럽 건축 양식하고는 어딘가 좀 다르기도 하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이 사진을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당을 배경으로 남편과 셀카를 찍으려고 남편 허리에 팔을 두른 순간, 내 팔에 뭔가 축축한 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갈매기 똥.... 더러운 것도 더러운 건데, 우리가 가지고 온 옷 중에 제일 비싸고 물빨래도 안 되는 생활한복에 뭔가 묻었다는 게 나를 패닉에 빠지게 만들었다. 거기다 우리는 휴지 한 장 갖고 있지 않을 뿐이고... 허둥지둥 화장실을 찾다가 성당 안에 있는 유료 화장실에 들어가서 뒤처리를 하고 나왔다.


완벽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갈매기 똥이 무슨 일인가. 하지만 헬싱키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 남편은 의연하게 "헬싱키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남편은 나중에 이 멘트가 얼마나 큰 고통을 불러올지 몰랐다.)


20170621_135857.jpg 트램이 지나다니는 헬싱키 성당 앞 교차로
20170621_140537.jpg 바닷가 근처 노천 식당에도 마리메꼬 식탁보

대성당 앞에서의 멘붕을 이겨내고 우리는 바닷가와 맞닿아있는 마켓 스퀘어로 향했다. (핀란드어로는 Kauppatori) 철판에서 해산물을 볶아주거나, 간단한 핫도그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핀란드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베리류를 판매하기도 한다.


뭘 먹을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찰나, 갑자기 남편이 소리를 지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봤더니 이번에는 갈매기 똥을 얼굴에 맞았다고 하는 거다. 아까 갈매기 똥과의 사투를 벌이고 정신을 추스른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좀 전에 남편이 의연하게 '헬싱키에서는 원래 이래'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나는 남편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다음 간식거리를 사서 테이블로 향했다. 멍하니 앉아있는 남편 표정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지만, 의연한 표정으로 나를 다독이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 그 순간 남편은 내가 너무나 얄미웠을지도 모른다.


20170621_145519.jpg Allas Sea Pool로 가는 길

마켓 스퀘어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Allas Sea Pool이 있다. 어디선가 최근에 생긴 세련된 수영장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수영복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의자들이 꽤 많이 놓여있어서 아무 데나 앉아 햇빛을 쬘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장소는 입장료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인구밀도가 낮으면 이렇게 운영해도 되는구나 싶기도 하고, 여기는 진상(?)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영장은 입장료가 있을 수도.. 우리는 수영장 위쪽 카페테라스 쪽에 앉아있었다.)


# Allas Sea Pool 정보는 이 곳에서 > http://www.allasseapool.fi/eng.html



20170621_152549.jpg 무민 카페 들여다보는 남편

밖에 앉아있으니 바닷바람이 은근 쌀쌀했다. 우리 둘 다 긴팔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가디건을 걸치지 않으면 싸늘함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헬싱키 시내에 있는 4개의 무민 카페 중 한 곳을 가 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다녀온 무민 카페는 무민 인형이 많이 있어서 그런가 아기자기한 느낌이 강했는데, 헬싱키의 무민 카페는 인형보다는 무드등, 머그, 유리 데코 정도 외에는 무민 아이템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무민 테마 카페라기보다는, 무민을 좋아하는 사람의 가정집의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170621_153205.jpg 깔끔한 북유럽의 카페
20170621_153200.jpg 무민 마마 머그에 커피를

이 곳에서는 커피값을 내면 내가 알아서 원하는 머그에 커피를 받아 마실 수 있게 해 준다. 아라비아 핀란드에서 봤던 여러 머그잔이 가득 쌓여있으니 평소 써보고 싶었던 머그를 쓰면 된다. 과연 무민 팬들을 위한 공간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0621_154930.jpg 갑자기 비가 내리네

카페에 앉아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무민과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밖을 보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화창했던 날씨는 어디 가고, 엄청난 빗줄기가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 우산을 갖고 있긴 했지만, 나는 발목까지 오는 치마에 남편은 긴 바지를 입고 있어서 바로 나갔다가는 옷이 쫄딱 젖을 것만 같았다.


비가 그치길 기다려봐도 빗줄기는 잦아들질 않고, 저녁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언제까지고 이 곳에 있을 수는 없어서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5분 만에 쫄딱 젖은 채로 저녁 식사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갖고 온 옷 중에 제일 비싼 옷인데, 헬싱키에서 참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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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말고도 헬싱키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여러 디자인 제품들이었다. 헬싱키에는 인테리어 제품이나 디자인 소품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정말 많다. 나중에 내 집과 함께 두둑한 지갑이 생긴다면 이대로 꾸며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소품부터 가구까지 모두 내 맘에 쏙 들었다.


디자인 소품 샵을 다니면서 눈에 띈 것은 핀란드의 유명한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의 디자인이었다. 우리가 흔히 '북유럽 디자인'하면 떠오르는 의자와 스툴, 이딸라의 흐르는 듯한 디자인의 유리그릇을 만든 사람이 바로 핀란드의 국민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알바 알토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무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쓰느라 알바 알토 전시회나 그의 건축물들, 암석교회, 아라비아 팩토리 아울렛을 가보지 못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어야 다시 이 도시에 올 동력이 생기지 않을까. 어딘가 아쉬움, 갈매기의 악몽, 축축하게 젖은 한복을 남기고 우리의 헬싱키 도심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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