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답지 않게 먹방을 포기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안식휴가 때 있었던 일들을 글로 남기면서 꼭 브런치 북을 발행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생각보다 매거진 글 30개 채우는 게 쉽지 않아서 나의 브런치를 외면했었다. 뭔가 그 과제를 완성하지 못하면 다른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새해도 되었고 해서 다시 용기를 내어 글을 써 본다. 적당한 크기의 주제를 잡는 것도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작년 11월 중순쯤 후쿠오카로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마 지난여름쯤이었을 텐데, 저가항공사 한 곳에서 특가 항공권을 판매한다고 해서 처음으로 컴퓨터와 핸드폰을 번갈아가며 시도하다 꽤 저렴한 가격에 후쿠오카 왕복 항공권을 구매했다. (인당 왕복 15만 원 이하) 짧게 여행 다녀오기 좋은 곳이라고도 하고, 료칸을 경험해 볼 생각에 기대가 매우 컸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생각만큼 평화롭지 않았다.
현지에서 무슨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가 티켓 끊을 때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긴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11월 여행을 두고 앞뒤로 남편 출장 일정이 잡혔다. 남편은 출장을 다녀오고 딱 하룻밤 쉬고 나서 다시 나와 여행을 가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후쿠오카에서 돌아온 다음 인천공항에서 나는 집으로, 남편은 출장을 위해 김포공항 가서 또다시 비행기를 타야 하는 괴이한 스케줄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 힘들지 않겠냐고 재차 물었지만 남편의 강경한 의지로 이 여행은 강행하기로 했다.
그다음은 우리에게 새 식구가 생긴 것. 고양이 도미를 입양한 지 한 달 좀 더 지나서 여행을 가야 했다. 다행히 우리 아파트에 같이 사는 친한 동료가 프로 집사이기도 해서 우리가 여행 간 동안 탁묘를 해 주기로 했다. 워낙 사교성 좋은 아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집에 고양이도 있으니 외롭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고양이를 맡겼는데... 이후 벌어진 일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 아침, 남편은 현지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야 우리 집에 도착했다. 그래서 하루는 푹 쉬라고 얘기했는데 도미 피부병 때문에 병원도 다녀오고, 친한 동료가 퇴사한다고 해서 송별회를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이 송별회가 우리 여행에 엄청난 여행을 미칠 줄은 몰랐는데... 그 날 송별회 장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됐는지 배탈이 난 것이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바로 이어서 출장까지 가야 하는데 배탈이라니! 여행 당일 아침 병원에 가서 약을 받고, 여행지에서 무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우리는 조심조심 공항으로 이동했다.
바로 뒤이어 가야 하는 출장 때문에 우리는 캐리어를 하나 더 들고 왔는데, 택배사에서 짐을 보관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곳은 보관장소가 꽉 차서 받지 않는다며, 다른 곳을 가보라고 했다. 다른 택배사는 정확히 공항 끝에서 끝까지 가야 했다. 힐링하러 여행 가는 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인천공항은 또 어찌나 넓은지.... 후쿠오카로 그냥 순간이동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덕분에 내 만보계는 후쿠오카로 떠나기도 전에 만보를 달성했다며 빵빠레를 울렸다.
이 날 우리의 공항 도보 루트: 리무진 버스에서 하차 -> 3층 써니뱅크 부스에서 환전한 돈 찾기 -> 유심 수령하기 -> 체크인 -> 첫 택배사 방문 -> 1층에도 택배사가 있길래 1층으로 내려감 (하지만 이 곳은 짐 받는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 -> 다시 3층 택배사를 가기로 하고 끝에서 끝까지 이동 -> 3층 택배사에서 짐 보관 -> 여행자보험 가입 -> 수속하러 면세구역 입장 -> 면세점 구경 -> 트레인타고 탑승동으로 이동 -> 넉다운
첫날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늦은 저녁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고, 버스를 타고 하카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다음 3분 거리의 호텔에 체크인한 게 전부였다. 평소였다면 호텔에 짐 풀어놓고 야식이라도 먹으러 나갔겠지만 남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뭘 먹으면 오히려 상태가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처음으로 여행지에서의 소중한 1끼를 포기했다.
둘째 날은 유후인으로 가는 날. 역시 평소 같았으면 아침부터 맛있는 걸 먹고 스케줄을 시작했을 텐데, 우리는 오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챙기고 버스터미널 안에서 유후인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뿐. 제대로 된 식사 대신 간단한 주먹밥이랑 빵, 음료수로 이 날의 아점을 대신했다. 료칸에 가면 가이세키 정식이 우리를 기다릴 텐데, 그때 먹지 못하면 더 슬픈 일일 테니까 둘째 날 아침과 점심도 포기한 것. 나도 배가 고팠지만 함께하는 동행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뭘 먹고 싶은 생각이 딱히 들지 않았다.
후쿠오카에서 유후인 가는 방법은 크게 기차와 버스가 있는데, 기차는 '유후인노모리'라고 해서 기차 내부도 예쁘게 꾸며져 있고 안에서 도시락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여름에 비가 많이 내려서 철로가 유실된 바람에 빠르게 유후인으로 가는 노선은 이용할 수 없고, 돌고 돌아 무려 5시간 걸려서 갈 수는 있다고 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우리는 시간이 더 중요한 여행자들이므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겠지!
유후인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 말처럼 시내가 정말 자그마해서 놀랐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차 두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메인 길이다. 이 메인 길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쭉 늘어서있다. 택시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 우리는 료칸 체크인 시간 전까지 느지막이 걸으면서 유후인 구경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다는 점... 막연하게 따뜻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코트 하나 걸치고 오들오들 떨면서 걸었다.
걷다가 유후인에서 유명하다는 금상고로케 가게를 발견했다. 평소 같았으면 1인 2고로케는 충분히 먹었을 텐데, 내 파트너의 위장 상태가 양호하지 않으므로.. 조심조심 고로케 1개를 사서 나눠먹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가 따끈하고 바삭한 고로케가 정말 맛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면 야옹야옹 소리가 나는 집이 눈에 들어온다. 강아지의 집과 고양이의 집이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우리는 이제 고양님을 모시는 집사니까! 고양이의 집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1층은 주로 고양이 그림이 새겨진 사람용 물건이 많았고, 2층에는 고양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기타 물품들이 좀 있었다. 놀랍게도 2층 케이지 안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도 있었다는 점... 네트망 안으로 오뎅꼬치를 잠깐 흔들어줬는데 정말 좋아했다. 매우 넓은 케이지라서 아주 답답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더 자유롭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양이 집을 떠났다.
이건 아마 돌아올 때 찍었던 것 같은데 스누피 컨셉으로 꾸며진 가게와 찻집이 함께 있는 곳이 있었다. 내가 무민 대신 스누피를 좋아했다면 정신 못 차리고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다행히(?) 유후인에는 무민 컨셉의 장소가 없었다.
유후인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체크인 시간이 다 됐다. 료칸에 전화해서 송영 차량을 보내달라고 하면 차를 보내주는데, 지도상으로는 가까워 보여도 캐리어를 끌고 걸어갈 만한 거리는 절대 아니다.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도착한 우리의 료칸은 사토야마 사후. 전통적인 외관과 다르게 프론트 데스크는 모던한 느낌에 크리스마스트리, 산타 피규어까지 장식돼 있어서 오묘했다.
직원 분 안내에 따라 우리 방으로 향했는데 생각보다 방이 훨씬 넓어서 놀랐다. 네 명이 자기에도 충분한 크기였고, 침대 방과 다다미 방이 미닫이문으로 구분됐다. 화장실과 욕실도 나눠져 있었다. 방 안에서는 쑥 같은 걸 태우는 향이 났는데, 그걸 차로도 마시고 향으로 쓰기도 했다. 우리가 가장 감탄한 부분은 역시 방에 딸린 노천 욕탕. 이 료칸 안에 공용 탕과 전세탕이 있지만 방 안에 욕탕이 있으니 훨씬 편하게 쓸 수 있었다. 거기다 뜨끈한 물에 앉아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라니. 눈이 올 때 오면 더욱 낭만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끼를 거의 못 먹고 맞이한 료칸의 가이세키. 약간 퓨전 정식 느낌이 나기도 했는데 조금씩 음식을 먹어야 하는 우리에게 딱 맞는 정도의 양이었다. 특히 개인 팬(?) 위에서 구워 먹었던 고기가 정말 맛있었는데, 역시 소고기도 조금씩 먹어야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별도의 식당에서 방 별로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시끄러워서 조금 불편했다. 다음에 료칸을 간다면 방에서 먹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해 봐야겠다. (이렇게 돈을 더 내게 되고...)
무사히 료칸에 도착해서 뜨끈한 온천물에 앉아 몸도 풀고, 가이세키 정식도 먹고 나니 몸이 노곤 노곤해지는 것이 피로가 싹 풀리는 듯했다. 다행히 남편 컨디션도 훨씬 좋아져서 다음날부터는 일반식(!)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괜찮을 줄 알았던 도미에게 문제가 있었다. 탁묘를 보낸 지 3일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다고만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간식을 줘도 외면하고, 심지어 코에 묻혀줘도 맛도 보지 않는다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영상통화로 도미 이름을 불렀더니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야옹,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보호소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버려졌을 거라 생각한 걸까. 마냥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다행히 나의 사려 깊은 동료 부부는 늦은 밤이었는데도 도미를 우리 집에 다시 보내준다고 했다. 도미는 우리 집에 도착하니 밥도 먹고 야옹야옹하면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워낙 씩씩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줘서 몰랐는데 우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또 우리는 도미의 집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료칸에서 꽤 이른 시간에 아침을 준비해주었다. 저녁과 마찬가지로 양은 많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음식들로 준비돼 있어서 아침식사로 좋았다. 귀차니즘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다른 탕들도 다 구경하고, 료칸 구석구석을 탐험해 볼 텐데, 온천은 방에 딸린 것으로도 충분하다며 온천욕을 하고 방 안에서 빈둥거리다가 료칸에서 체크아웃했다.
료칸에 있는 동안 먹고 쉬는 것밖에 안 했는데 덕분에 그 사이 우리 둘 모두 완벽하게 충전된 느낌이었다. 이래서 휴식이 중요하구나, 다음에 료칸에 올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조금 부지런히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쿠오카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전날 보지 못한 긴린코 호수에 다녀왔다. 엄청나게 크지는 않아도 단풍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날씨가 많이 쌀쌀하지만 않았어도 호수 한 바퀴 산책을 했을 텐데, 호숫가 카페에 앉아 호수 풍경을 보는 걸로 만족했다.
후쿠오카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이치란 라멘! 다른 건 못 먹어도 이것만큼은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로 나눠진 가게인데, 주문도 심지어 자판기로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극도로 절제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외국인인 우리는 편리했지만, 오롯이 음식하고 나만 남은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후쿠오카에는 큰 쇼핑몰들이 많다. 우리 숙소가 있는 하카타에서 조금 거리가 있지만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간 곳은 고양이 용품이 저렴하다는 이온몰이었다. 우리가 여행 간 사이 밥도 제대로 안 먹는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더욱 제대로 된 선물을 사다 주고 싶었다. 여기서 도미가 좋아할 만한 간식, 동료 집사들을 위한 선물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모시는 냐옹님을 위한 것)을 구매했다. 내가 봐도 맛있어(!) 보이는 간식들이 많아서 종류별로 쓸어담았다.
그다음 저녁을 먹으러 캐널시티로 향했다. 건물 중간에 운하가 지나가는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그 풍경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이리저리 밥 먹을 곳을 찾다가 포기하고 (너무 비싸기도 하고 맛있어 보이는 곳이 없었음) 펫 용품점에 들렀는데 디즈니 펫 의류를 판매하고 있었다. 디즈니 덕후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도미를 위한 올라프 의상을 구매했다.
캐널시티에서 밥집 선택에 실패하고 천천히 걸어서 하카타역으로 향하는데 화려하게 꾸며진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뭔가 행사가 진행되는 듯한 비주얼. 자세히 가서 살펴보니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것이었다. 여러 부스에서 피자, 핫도그, 커피 등을 판매했고 우리는 초대형 사이즈 핫도그를 사들고 나름 후쿠오카의 크리스마스 정취를 느끼기로 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한 달 넘게 남았지만, 이미 마음은 저물어 가는 한 해에 대한 아쉬움과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크리스마스를 외국에서 보내면 어떤 기분일까. 기회가 되면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남반구 어딘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보고 싶다. 나라마다 다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일 것 같다.
여행을 마치고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고양이가 걱정돼서 조금이라도 빨리 발걸음을 옮겼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야옹야옹 우는 도미를 보니 '고양이는 주인을 못 알아본다', '고양이는 정이 없다', '고양이는 외로움을 안 탄다' 같은 류의 말은 절대 사실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 더 잘해줄게, 도미!
오자마자 짐 풀고 후쿠오카에서 사 온 것들 입혀봤는데... 산타 옷은 작아서 벨크로가 잠기지도 않는 데다가 입히면 털썩 누워버렸고, 올라프는 옷이 너무 컸다. 산타모자도 30초 써주나 싶더니 벗으려고 난리부르스. 그나마 캡틴 넥타이는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역시, 고양이 옷 입히는 건 집사의 욕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