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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Jan 22. 2018

한겨울의 세탁기는 위험하다

다섯 번째 일기, 1월 22일

[사진설명] 회의가 끝나고, 카페에서 티타임. 


오래간만에 회의를 하고 카페에 앉아서 창 밖을 보는데 비하고 섞인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어제 본 일기예보가 머리를 스쳤다. 당장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날씨가 엄청 추워진다고 했다. 최저기온 영하 16도, 최고기온 영하 8도. 하루 종일 영하의 날씨라니 이쯤 하면 길바닥이 꽁꽁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난주 추위 때문에 겪었던 엄청난 사건이 떠오르면서 오늘 당장 집에 가서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 금요일은 영하의 날들이 계속된 지 2-3일쯤 되는 날이었다. 퇴근하고 와 보니 남편이 세탁기를 돌려놓고 저녁밥을 만들고 있었는데 세탁기에 자꾸 에러가 난다고 했다. 몇 번 돌아가는 소리가 나다가 삐삐 소리를 내면서 멈춰버린 세탁기. 어디가 고장 났나 하고 에러 메시지를 검색해 보니 '배관이 막혀있다'는 뜻이란다. 친절한 주부 블로거의 설명에 따라 세탁기 밑부분의 작은 문을 열고 밸브를 잡아당기는 순간, 배관으로 내려가지 못하던 물이 그 밸브를 통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밑에 대야 같은 걸 받쳤어야 했는데 바로 물이 쏟아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던 것이다. 저녁 시간이라 이대로 베란다에 고인 물을 뒀다가는 밤새 베란다가 아이스링크장으로 변할 기세였다. 안 쓰는 수건으로 젖은 베란다를 닦아내는 동안 짜증이 솟구쳤다. 불금 저녁시간에 밥도 못 먹고 이게 뭐 하는 건가, 게다가 세탁기 안에는 탈수도 제대로 안 된 빨랫감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단 밥을 먹고 저 빨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남편과 머리를 맞대로 논의를 시작했다. 손으로 짜서 대충 건조대에 널 것인가, 우리에게 건조기가 있으니 건조기에 넣어서 말릴 것인가, 아니면 빨래방에 갈 것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빨래는 탈수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어디 널어놓으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상태였다. 이 상태로 베란다에 뒀다가는 다음 날 꽁꽁 얼어버린 빨래를 볼 것만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우리는 소중한 불금 저녁시간을 빨래방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영하의 날씨에 젖은 빨래를 싣고 빨래방으로 향하는 기분이란. (그것도 금요일 저녁에 윤식당도 못 보고) 내 몸과 마음도 젖은 빨랫감처럼 천근만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빨래방에 오자마자 우리는 이 빨랫감을 세탁기에 다시 돌릴 것이냐, 건조기에 바로 넣을 것이냐 잠시 고민을 했다. ...그 때 한 번 더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우리는 드럼통처럼 큰 건조기를 보면서 이렇게 출력이 좋은 건조기라면 우리의 빨래를 금방 뽀송뽀송하게 말려주리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근처 떡볶이집에서 야식을 즐겼다. 


30분 뒤, 다시 빨래방에 돌아왔을 때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는 김이 폴폴 나는 채로 젖어있는 빨래와 마주했다. 그냥 온도만 높아졌을 뿐, 전혀 건조가 되지 않은 것이다. 건조기에 넣은 돈도 아깝지만 불금 저녁시간을 빨래방 앞에서 보내고 있는 이 모습이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서 건조기를 돌리지 않는 이유가 있었건만! 저 커다란 건조기의 자태에 위압감을 느껴서 바로 저 안에 젖은 빨래를 넣는 멍청한 짓을 했단 말인가. 그때의 행동을 글로 옮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자신이 부끄럽고 원망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짜증이 나도 이대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주말 내내 젖은 빨래를 집에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우리는 다시 따끈하게 젖은 빨래를 꺼내 세탁기에 넣고, 앞으로의 시간을 온전히 빨래와 보내기로 했다. 세탁방에 핸드폰 충전기와 와이파이가 있는 게 새삼 감사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세탁과 건조를 마친 빨래를 본 순간, 이제야 이 미친 세탁기의 저주에서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우리의 소중한 저녁시간이 이렇게 날아가버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빨래방에서 건조기가 아니라 세탁기에 빨래를 넣었더라면, 부지런한 마음이 누그러들어 오늘 빨래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까. 아니 굳이 따지자면 잘못은 지구온난화로 비정상적인 한파를 만든 인간들 전체와 실내인데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게 만든 아파트 시공사에 있는 건데, 나 자신을 아무리 질책해봤자 별로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바로 후회를 그만뒀다. 



이번 주에도 엄청난 한파가 예고되어 있다. 우리 부부는 오늘 꼭 뽁뽁이를 베란다 유리에 붙일 것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세탁기를 쓰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시는 세탁기의 저주를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 빨래를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빨래방에 갈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한 참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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