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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계속되는 방송사 시험 실패에 좌절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갖게 된 꿈인 라디오 PD를 꼭 하고 싶었다.
혼자라는 생각에 너무도 외로웠던 나무에게 라디오는 그 순간을 잊게 해 주었다. 자신에게 말 걸어주던, 비록 자신의 말을 전하진 못 했지만, 그들의 말을 들으며 울고 웃었던 그때였고, 노래 한곡에 전해지던 위로는 지금껏 어떤 위로보다도 강했다. 괜찮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던 노래 가사에 나무는 혼자서 숨죽여 수도 없이 울었다. 그래서 자신도 그런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런 시간을 만드는 라디오 PD의 드러나지 않는 역할이 궁금했고, 노력해서 가능하다면 라디오 PD가 되고 싶었다.
쉽지 않은 시험에 나무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시간들을 나눠 쓰고 있었다. 우연히 다가온 효인이의 마음이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하는 것이 힘들었던 나무는 자꾸만 상황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싫어요, 안 돼요.. 자신의 그 말에 상처받을 상대의 마음을 미리 짐작한 나무는 끊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효인이의 적극적인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나무의 모든 걸 이해해 주는 듯했던 효인이는 언젠가부터 나무의 꿈을 허무맹랑하다고 했다. 지금껏 이루지 못한 건 포기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나무의 꿈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무는 처음으로 강하게 말했다. 아직은 포기하기 싫다고.. 나무가 알았다고 할 줄 알았던 효인이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것을 나무에게만은 하기 싫었던 효인이는 다시 온 나무의 실패의 순간, 위로 대신 결국 나무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너의 길이 아닌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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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던 직장에 취직한 나무는 생기를 잃고 무던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무의 의견대신 혼자 정한 미래의 계획에 들뜬 효인이는 나무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나무는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효인이는 자신만의 속도와 목표를 따를 생각임이 분명했다. 분명 나무와의 결혼이었지만, 나무는 안중에 없었다.
또다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던 나무였다. 나무를 너무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지금 나이에는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너무 잘난 사람보다는 나무 정도면 자신이 편할 것 같아 나무를 선택한 효인은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결혼이라기보다는, 결혼..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퇴근하는 중에 울린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나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셨어요?”
효인이의 엄마 전화였다. 단 한순간도 친절하지 않았고, 배려하지 않던 목소리였다.
“그래, 효인이가 너한테 준비해야 되는 거 전해줬지?”
어제, 우리 엄마가 이 정도는 해야 된다더라..라고 말하며 전해준 종이에 가득 적힌 목록들이었다. 나무는 답답했고, 갑갑했지만, 이 정도까지 진행된 일에 발을 빼지 못하고 있었다. 더 들어가면 들어갔지,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받았습니다.”
“그래, 빠진 게 있어서, 지금 적을 수 있니?”
나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서 뭘 더 바라는지..
“제가 지금 밖이라서 ..”
“그럼, 효인이 편으로 다시 보내마. 너의 부모님께 잘 전해드려라.”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은 예의 없는 통화였다. 나무는 한참을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지만, 떠올리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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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자락이었던, 다시 올 봄날이 가진 희망에 모두가 설레어하던 그런 날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의 바람은 몹시도 시렸다. 나무는 좀 전의 통화를 잊고 싶어, 해가 지는 하늘 아래를 무작정 걷고 있었다.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 끝에 걸려 있는 어떤 건물의 옥상이 그 순간 눈에 들어왔고, 의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나무는 그곳을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울 것 같았기에.. 무엇을 위함인지도 어떤 마음인지도 모를 그 발걸음에 나무는 어딘가로 향해가는 자신의 진심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보인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나의 인생도 아름다웠으면, 아니 조금만 더 괜찮았더라면.. 그 생각이 만든 삶의 아쉬움은 너무도 강력한 후회가 되어 그 순간의 살아갈 용기를 잃게 했다. 이 정도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서 멈춰봐도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무는 알았다. 수도 없이 해본 이 생각의 끝에 곧 다시 일어설 것을, 다시 걸어갈 것을. 그러나 일어서기 전에, 걸어가기 전에 한 번만 주저앉고 싶었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괜찮다면 꾸역꾸역 잡고 있는 모든 것을 한 번만 놓아보고 싶었다. 괜찮다면, 그래도 된다면.. 어차피 내 인생이니까.
옥상에서 바라본 유난히 파란 하늘은 서서히 어둠을 담고 있었고, 곳곳에 반짝이며 켜지기 시작하는 불빛은 그 하늘을 배경 삼아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도 그렇게 반짝이기를, 선명하기를.. 나무는 그러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안타까워하며 차가운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무언가를 놓을 듯 한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나무는 난간에 서 있는 누군가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그 뒷모습에 올려놓은 건지도..
난간에 올라앉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나무는 자신의 손발이 간질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거침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럼에도 두려움이 느껴져 나무는 누군가가 뭘 할지 몰라도 우선은 막아야 했다.
“저기..거기 위험해요. 내려와요.”
나무의 말에 뒤로 돌아보지도 않던 누군가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내려와서, 다시 생각해요. 거기는 위험해요.”
나무는 그 말을 하며, 혼자 너무 앞서 단정지은 것 같아, 다시 머뭇거렸다. 그럼에도 자신은 왜 그곳에 올라갈 마음을 내지 못하는지, 자신에게 조금씩 물어오는 생각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요. 저는 마음을 정했어요. 여기서 멈추고 싶어요.”
나무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고 싶어지고 있음을.. 불쑥 떠오른 생각을 발견하지 않았다.
“제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나무는 그 말이 자신의 마음인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몰랐던 아빠와 누군가가 주는 사랑도 받지 못하던 엄마.. 자신이 만약 죽음을 택해도 그들은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거였다.
나무는 자신을 위해 대신 슬퍼해주고 싶었다. 그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줄 수 있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덜 슬플 것 같았다고 생각하며..
그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껏 자신의 모든 후회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나무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너무도 많은 후회였고, 스스로를 탓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라임이가 떠올랐음을.. 너무도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나무는 그때 라임이에게 그렇게 말 한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했었다. 다가가고 싶을 때마다 라임이가 떠올랐기에, 새로운 친구를 원하는 스스로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음을 다해 다가와준 라임이랑 그렇게 끝나버린 사실이 원망스러워 나무는 더 이상 마음을 다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나무는 결혼도 하기 싫었다. 왜 이렇게 끌려 왔는지.. 자신은 결혼과 맞지 않음을 매 순간 깨닫고 있는 나무였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도 자신의 부모님과 똑같은 사람이 될 것이 뻔했기에, 결혼도 가정도 아이도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무는 난간에 앉아 있는 그 사람에게 다시 다가갔다.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두려워하는 게 느껴지는, 그 사람이 결정할 선택을 막아야 했다. 나무 자신도 사는데, 죽지 못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다. 언젠가 웃을 날을 기다리며, 미련스럽더라도 살아가길 바랐다. 그래서 말려야 했다. 살리고 싶었다.
나무는 천천히 난간 위에 앉은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놀라지 말라고 말을 하며.. 뒤돌아 바라본 그 사람의 눈빛에, 나무는 자신을 보았다. 나무 자신이 그 난간 위에 앉아 있었다. 나무에게 손을 내민 나무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의 손을 잡은 나무였다.
“살고 싶어요. 너무 살고 싶은데, 살아갈 용기가 없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울며 난간에 앉아 있는 나무의 말에, 서 있던 나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고만 있었다. 살려주고 싶었다. 아니, 살고 싶었다. 그런데 알 것 같았다. 이 순간 죽음으로 기울 거라는 걸.. 결국에는 자신이 죽음을 선택할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