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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 Jun 01. 2022

건강한 일탈

살짝 차가운 봄바람을 맞으며 햇볕을 맞으면 곧 뜨거워질 계절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이 금 방 올 줄 알았던 5월. 나에겐 여행의 대한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달이었다. 여행을 위해 모아둔 적금 통장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비행기표나 호텔을 알아보곤 했다.


김포공항에 갔던 그날의 설렘을 상기하며 버텨냈던 5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또 찾아왔다. 별 수 없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듯, 에스프레소 어른에게 조금 칭얼거렸다.


사실 언제든 떠날 수 있었지만 쉬이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공부나, 운동, 혹은 아이패드를 사기 위한 비용을 ‘여행 경비로 보탠다면’이라는 이유로 떠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고민하고 있는 내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를 즐겨보자며, 적은 비용으로도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여행 코스를 짜주겠다고 했다. 그때 생각했다. 역시 많이 다녀 본 사람은 달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어 볼 줄 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얼마 정도의 예산을 생각한다고 하니, 의외의 여행지도 추천해주었다.

바로 대구였다. 에스프레소 어른이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서울에서 KTX 타고 1시간 40분이면 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에 망설이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후 4시. 나는 조금 망설이다 이내 6시 40분 차를 끊었다. 그렇게 시작됐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탈이.


가방 하나에 잠옷 하나, 화장품, 카드 지갑, 아이패드를 들고 집을 나섰다. 잘 곳은 기차 내에서 찾아 예약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대구로 향했고, 그곳에서 에스프레소 어른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여행 동안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단연 1등은 에스프레소바에서 먹은 커피와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행 첫날 걸었던 밤의 온기와 대화가 가장 좋았다. 대구의 밤은 서울의 밤보다 약간 습하고 더웠다. 부산에 처음 갔을 때, 여름밤 공기는 굉장히 후텁지근했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묘하게 그날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


에스프레소바는 이탈리아식으로 커피를 내리는 곳으로 갔다. 테라스는 이미 만석이라 2층으로 올라가 창가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함께 에스프레소를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날 내가 먹은 것은 Strapzzato, Con Panna 두 잔이었다. 카페인에 민감한 나는 커피를 두 잔 이상 먹지 않지만, 오히려 에스프레소가 아메리카노보다 카페인 함량이 적다는 것을 알곤 안심하고 두 잔을 먹을 수 있었다.


Strapzzato는 초콜릿이 들어간 에스프레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콜릿과 어우러져 풍미가 더 좋아져 맛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기분 나쁘지 않은 쌉싸름함이 첫 맛으로 맞이하고 끝으로 갈수록 달라진다. 잔이 작기에 아껴 먹는다고 했으나 금방 먹어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로 먹은 Con Panna는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이 얹힌 상태로 나왔다. 처음 먹을 땐 에스프레소를 살짝 마시고, 두 번째로는 크림과 에스프레소를 같이 숟가락으로 떠먹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갈 땐 크림과 섞어서 먹었다. 세 번 다 맛이 달랐다. 한 가지만을 즐기는 라떼나, 아메리카노보다 다양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서울로 돌아와 에스프레소바를 찾고 있을 내 모습이 잠시 상상되어 웃었다.


아, 내가 그에게 비밀을 하나 말할 것이 있다. 에스프레소바를 나선 후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잘 먹고 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속이 메스꺼움을 느꼈다. 분명 얹힐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 말을 하자니 무리했다고 생각하거나, 에스프레소바를 함께 또 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말하지 못했다.

 

이때 나는 ‘너의 결혼식’에서 나오는 ‘우연’이가 매운데도 불구하고 승희와 떡볶이를 먹기 위해 억지로 먹는 장면이 생각났다. 떡볶이를 잘 먹지 않는 남자들이 여자 친구를 위해 먹으러 가는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남긴 라멘은 맛이 없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


시간은 어느덧 여섯시를 가리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로 향했다. 마지막을 배웅받으며 기차를 올라타고 난 후 얼마 안돼서 이상한 감정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후회하기에는 기뻤고, 기뻤지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불현듯 밀려오는 불안의 감정이 찰랑이기 시작했다. 심장도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혼자서 긴장한 채로 기찻길을 달렸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아침 같았다. 그날 아침이 유독 시렸었고, 꼭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것 같은.

조금 전의 시간이 더욱 간절해지는 감정들이 너무 낯설었다.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친구에게 연락해 이게 무슨 감정일지 물어보았다.


너무 건강한 일탈을 하고 와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친구도 덧붙이기를, 그만큼 소중한 ‘추억’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사실 5월은 여행의 갈증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던 것은, 잠시 부담을 내려놓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사회생활의 대한 부담, 관계의 부담, 스스로 미래의 대한 부담 등 여러 가지 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가 책임지고 있지 않고 있던 것들에 대한 것들을 확인하는 과정은 꽤 창피하고 상기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는 자신이 더 나을 거라고 위로하며 하루를 버티는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잠시나마 괜찮게 해 준 여행이었다. ‘괜찮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먼 훗날, 아주 괜찮지 못할 때에 뒤돌아서 생각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힘을 줄 수 있는.


더 눈물이 났던 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과의 그런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에스프레소 어른을 참 많이 좋아한다.

그가 하는 말, 생각, 마음들이 너무 좋아서 종종 말하곤 한다.


언제 어느 때이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당신과 같은 어른이 되겠노라고.

좋아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이다.


동경하는 사람과의 하루가 나를 변화시킨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뀐 게 있다. 언젠가 나라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렇게 떠올려 주기를.


그 친구 참 예뻤어.

그 친구랑 함께 해서 따뜻했어.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애 한 번이라도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부지런히 뛰어야 함을 또 새삼 느낀다.

그런 따뜻한 일탈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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