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인정해야 했다.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으로 픽셀을 깎고 색감을 조정하며 희열을 느끼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불과 얼마 전 구글의 최신 AI 툴이 뱉어낸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 나는 경이로움보다 서늘한 공포를 먼저 느꼈다.
십수 년을 밤새워 갈고닦은 나의 기술이 단 몇 초 만에 대체되는 광경은 마치 평생 지켜온 밥그릇이 산산조각 나는 환청처럼 들렸다.
내가 며칠을 고민해야 나오는 시안을 기계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사이에 수십 장씩 쏟아낸다.
그 압도적인 속도와 퀄리티 앞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었다.
내가 가진 무기가 더 이상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꽤 쓰라린 일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앉아 패배감에 젖어 있기엔 세상의 시계가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AI는 손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지만 머리가 없다.
명령어가 입력되면 그림을 그려내지만 도대체 이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보여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소비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클라이언트들이 진정으로 힘겨워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예쁜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는 많아졌지만 정작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전략을 짜는 설계자는 여전히 부족하다.
AI는 내 손발이 되어줄 아주 성능 좋은 하청업체일 뿐이다.
그들에게 정확한 작업 지시서를 내려줄 총괄 디렉터의 부재.
그것이 내가 발견한 기회이자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짜 문제였다.
나는 이제 디자인을 잘한다는 것의 정의를 다시 내리기로 했다.
예전에는 포토샵 단축키를 얼마나 빠르게 누르느냐가 실력이었다면
이제는 얼마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기획하느냐가 진짜 실력이다.
마우스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모니터 커서로 유영하던 시간을 줄이고 노트 위에서 생각의 구조를 짜는 시간을 늘렸다.
남들이 AI가 그려준 그림의 퀄리티에 감탄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결과물을 얻기 위해 입력해야 할 프롬프트 한 줄의 맥락을 고민해야한다.
우리 브랜드의 페르소나는 누구인지 이 시각물이 전달해야 할 단 하나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언어로 구조화하고 논리적인 기획서로 만들어내는 과정.
이것은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자 디렉터가 쥐어야 할 새로운 칼자루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기술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파도 위에 올라타 서핑을 즐길 것인가.
나는 기획이라는 튼튼한 서핑보드를 준비했다.
손으로 그리는 속도는 느려졌을지 몰라도
문제를 꿰뚫어 보고 해결책을 설계하는 사고의 깊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이제 나는 클라이언트에게 단순히 시각물을 납품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당신의 비즈니스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고 설계하는 파트너다.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쥐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본질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