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주는 만큼 잘 자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춘기) 아들과의 동고동락(2)
몇 년 전 꽃집에서 작은 홍콩야자 모종을 사서 집에 데려온 적이 있다. 황톳빛 플라스틱 화분을 벗겨내고 새하얀 화분에 분갈이를 하고 물을 주었다. 홍콩야자는 쫙 펼친 아기 손바닥 같은 잎들을 터트리며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어여쁜 연둣빛 잎사귀. 어린것은 하나 같이 모두 어여쁘지 않던가? 나는 갈구하는 손짓에 화답했고 매일매일 잎새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손가락에 마디가 증식하듯 자그마한 손바닥은 점점 크기를 더해가고 그 틈을 비집고 태어나는 연둣빛 손바닥들. 그 여린 잎사귀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 생명력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잊지 않고 물을 주었고 반양지에서 키워야 한다길래 살짝씩만 햇빛을 쬐게 하며 정성을 들였다. 나는 정성의 힘을 믿고 있었다. 지극한 정성엔 언제나 하늘이 화답할 거라 믿었다.
과한 정성 때문이었을까? 어린잎들은 괜찮은데 커다란 잎들의 끝부분부터 좀 먹듯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그러더니 점점 증상은 심해지고 있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원인을 찾을 만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나는 며칠을 전전긍긍했다. 정성을 들인 만큼 문제에 대한 걱정도 커져만 갔다. 단지 의심이 가는 것은 과습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는데... 분명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면 된다고 꽃집에서 알려 주었기 때문에 설마 과습일까 싶었다. 물을 주는 횟수만큼 물의 양도 중요하지만, 보통 큰 화분에 물을 주듯 흠뻑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물의 양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횟수는 정확히 지켰고 그렇다면 물의 양과 집안 환경에 원인이 있을 듯했다. 실내가 건조한지, 습한지에 따라 화분도 영향을 받을 것 같았다. 반양지여서 항상 블라인드를 치고 간접 햇빛을 받게 키우던 것을 과감히 직사광선을 쬐게 해 놓고는, 나의 정성이 다했는지 그만 존재조차 깜박 잊어버린 여러 날 뒤의 일이었다. 검게 말라가던 잎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늘을 향해 크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히려 무관심하게 방치했던 며칠이 - 일주일보다 더 긴 며칠이었던 듯하다 -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직사광선에 잎이 혹시 타들어 갈까 봐 애지중지 하며 햇빛도 별로 안 쬐이고 서둘러 그늘로 데려다 놓고 물은 흠뻑 주었으니 과습이 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항상 경험해 보면 알게 되는 일이지만, 사전적 지식은 늘 한계가 있었다. 물론, 운이 좋게 내가 하는 행동이 아귀가 맞아 이런 과정을 안 겪고 잘 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고, 운이 없었던 덕분에 나는 이 과정을 나의 하나의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중학생 아들을 키우며 문득 그때의 홍콩야자가 떠올랐다. 교복에 물기가 다 말랐는지 어쨌는지도 관심 없고 그저 주어진 것을 꿰입고 나가기 바쁜 아들을 보내며 '다 귀찮을 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손에서는 분명 덜 말랐다는 것을 감지했는데도 괜찮냐는 질문에 몰라, 로 일관하는 아들. 생활복 입으라는 말을 까먹고 그냥 교복을 입고 갔다는 아들. 아들에게는 그것이 '뭣이 중헌디'의 영역이었으리라.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 외에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할 말이 차고 넘치는 아들. 그런 아들에게 나는 거리를 둔다. 적당한 거리. 너무 멀어져서도 안되고 너무 가까워져서도 안 되는 거리. 사람 관계에서도 그 거리는 중요하다. 너무 가까워지면 기대가 커지고 정성을 쏟게 되면 그에 따른 실망감이 커지게 된다. 정 없는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감을 둘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관계의 생명력이 길어지니, 따지고 보면 짧고 깊은 관계보다 이득인 셈이다.
집에 있는 날이면 남편은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인다. 아들은 과한 집착을 경계하고 아빠와의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데 남편은 아들이 자신의 무한 애정을 몰라주는 것이 못내 섭섭한 듯하다. 구원투수로 나를 소환하기도 한다. 나는 몇 번은 호응의 뜻으로 아들에게 잔소리 - 아들은 거의 대부분의 말들을 잔소리라 여긴다 - 를 하고 몇 번은 그냥 넘기기도 하면서 중간에서 외줄 타기를 한다.
"지금 나이 때는 조금 모른 척해줘야 돼. 하나하나 간섭하면 오히려 반항심만 갖게 될걸? 사소한 건 그냥 넘기고 정말 중요한 것만 알려주면 될 거야. 그리고, 말로 가르치려 하면 안 되더라.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나 요즘에 공부하잖아. 내가 공부하는 모습 많이 보여줄게."
위태로운 관계를 바라보다 한 마디 건넨 나의 말에, 남편은 뭔가 맞대응을 하려다 그만두는 눈치였다. 마음 같아서는 아들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고쳐주고 싶겠지만, 일단 나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 것 같았다. 사실, 믿지 않는다 해도 별로 뾰족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애정으로 하는 말들이 아들은 간섭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남편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했다.
관심을 쏟고 애정을 쏟는 만큼 잘 자란다면, 우리나라 부모만큼 아이들을 잘 키우는 부모들은 없을 것 같다. 식물처럼, 아이에게도 적당한 관심이 아이를 잘 성장하게 하는 것 같다. 과유불급. 특히, 사춘기 아이를 키울 때는 이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아이는 언제 컸는지 내 키 보다 한 뼘 이상 더 자랐고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시기를 지나쳐 홀로 설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을 귀찮음으로 표현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부모 역할의 어려운 고비를 또 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다려주는 것,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는 것. 이 두 가지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도 쉽지 않은 과제 이건만, 아이는 내게 그런 것들을 배우라 한다.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몰랐을, 덕분에 나도 조금은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는 아들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효자, 라 말했다. "내가 왜 효자야?",라고 묻는 아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지금은 말해줘도 알지 못할 생각들을 떠올리며 "그냥, 이쁘니까.",라고 대답한다. 나는 아이를 통해 오늘을 배우고 내일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