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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Apr 08. 2022

쓰는 것에 대하여

시 쓰기

시를 공부하게 되면서 시를 더 쓸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일일까?

몇 년 전 문태준 시인의 시 강의에 갔다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시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그 다양성의 갈래는 흩어진 사람 수만큼이니 가 가진 생각의 고유성이야 말해  무엇하랴. 내가 하는 생각은 타인의 생각과 비슷해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생각은 특별한 것이 된다. 특별한 것을 쓴다는 것은, 즉, 나의 생각을 쓰는 일이다. 그게 말처럼 쉽다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되었겠지만, 의미를 분석해 보면 그렇게 쉬운 일이다. 순간, 떠오른 감정을 쓰고 떠오른 생각을 쓰고 관찰한 사실을 쓰고...... 그렇게 늘 '영감님'을 기다렸다. 영감님은 아니 오실 때도 있었고 성급하게 하루에 두 번이나 방문할 적도 있었다. 시의 첫 문장은 신이 주신 문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시의 마지막 문장이 신이 주신 문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간절히 기다렸다. 신이 내게 문장을 주시길......


신기하게도 신은 문장을 주시기는 주셨다. 밋밋했던 시어들이 문장 하나로 옷을 바꿔 입었다 - 부끄럽게도 내가 시라고 쓰면 작품성에 관계없이 그것은 분명 시다. 신이 주신 문장에 기대어 계속 쓰다 보면 시를 쓰는 일이 점점 성숙의 단계에 들어설 것이라고. 서점에 뿌려진 수많은 글쓰기 책에도 그저 열심히 쓰라고 되어 있으니. 매일 쓰다 보면 무엇인가는 될 거라고. 나의 성실성에 박차를 가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나는 사실, 일기처럼 시를 썼다. 놓치기 아쉬운 하나의 장면, 하나의 생각,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신비. 보이는 대로 직관대로 썼다. 시는 술술 써졌다. 영감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그나마 일기는 벗어난 수준 같아 만족하기도 했다. 시는 쉽게 써야 한다고. 쓰는 사람도 어렵고, 읽는 사람도 어려운 시를 누가 읽냐고. 시인들이 구체적인 시작법보다는 시는 이래야 한다며 두리뭉실하게 감싸 놓은 것만을 보고 시는 그래야 한다고 눈 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쉬운 시가, 직관적인 시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은 사실이니까. 사람은 늘 보고 싶은 부분만 본다. 전체에서 부분, 내게 편한 부분만 보려 한다. 전체는 늘 한 번도 숨어있었던 적이 없건만.

 

시작법을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감았던 눈을 뜬 기분이 되었다. 시를 공부하지 않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날 때부터 영재성을 타고나길 바란 요행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신이 주신 문장은 그런 요행을 바란 것이 아닐까? 밋밋한 문장에 조미료를 톡톡 치듯. 왠지 조금 그럴 듯 해 맛을 음미하면서. 분명, 시인들에게는 신이 주신 문장이 요행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기까지 읽고 쓴 노력들은 산맥을 이루었을 테니까. 노력이 있을 때에만 영감 한 방울이 의미를 갖는다.

쓰고 보니 에디슨의 명언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신기하다. 시인도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시를 쓰지 않을까?


많은 책들이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매일매일, 꾸준히, 많이 많이 써보라고 말한다. 많이 읽고 많이 써라. 맞는 말이다. 많이 읽다 보면 저절로 쓰는 방법을 터득할 테니. 그 많이란, 얼마나 많이가 되어야 할지, 분명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었다. 재능이란 어쩌면 빨리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는 말처럼. 그 말은 반대로 시간이 다 다를 뿐, 노력하면 언젠가는 모두가 깨닫게 된다는 것은 아닐까? 좋아하는 것을 노력이 이기기는 힘들다. 자꾸, 무언가 쓰고 싶다면 치열하게 써서 그래도 좋은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쓰고는 싶은데 늘 길목에서만 서성이고 있다면 진정 좋아하는 것인지 알기 조차 어렵다. 노력은 좋아하는 일에서도 힘든 것이 사실이니까. 힘듦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다면 그것은 분명 좋아하는 일일 것이다.


내게는 빨리 깨닫는 재능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노력 또한 없었던 것 같다. 쓰고 싶다면서 길목만 서성인 꼴이었다. 빨리 깨닫는 재능이 없으므로, 시작법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책을 고를 때 왜 이런 책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까? 분명, 시중에는 시작법 책이 넘치고 넘쳤을 텐데...... 귀를 닫고 머리를 열지 않으면 세상이 작게 보인다. 나만의 세상에 갇혀 그것이 전부인 줄 착각하게 된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했거늘, 항상 나무만 보게 되는 건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좀 불편해야 얻어지는 것이 있다. 누군가의 바른말이 당장은 상처가 되어도 시간이 흐르면 고마운 감정이 생긴다. 내게 바른말을 해준다는 것은 애정이 있다는 것이므로.


창가에 방치된 화분의 식물이 각양각색으로 뒤틀려 자라고 있다. 관심을 주지 않았더니 잎이 누렇게 변색된 녀석부터 줄기까지 뿌리를 뻗은 녀석, 태양을 향해 한쪽으로 비뚜름하게 자라는 녀석까지 다양하지만 다행이라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시 관심을 주고 애정을 쏟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기를 머금을 것이다.

 

처음 야기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결론은 시를 공부하게 되면서 시를 쓰는 것이 더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다. 사물을 오랫동안 정밀하게 관찰하는 것도 해보지 않은 어려운 일이었고 문장을 지우고 지우며 실패를 거듭한 문장을 버리는 일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는 쉽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길이가 길다고 어렵고 짧다고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일단 시는 시만이, 소설은 소설만이, 에세이는 에세이만이 가진 특징을 이해하고 써야만 한다는 것. 그래야, 방법이 열리고 길이 열린다는 것.

나는 시 세계에 분자 같은 발자국 하나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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