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햇빛을 비켜 앉은 그늘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바람이 햇빛을 피해 불었던 것일까요? 햇빛 속에서 손 그늘을 만들며 덥다고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저녁, 온 세상이 그늘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늘 속에는 오후보다 더 서늘한 바람이 머물다 갑니다. 제일 먼저 귀뚜라미가 바람을 느끼고 날개의 돌기를 비벼 소리를 냅니다. 매미의 뜨겁던 계절이 언제 가버린 것인지. 아침을 깨우던 소음과 새벽녘까지 울어대던 소음. 저는 여름 내내 소음을 들었습니다. 소음을 들으며 매미를 알아갔습니다. 우연히 지나치던 나무에 다닥다닥 매달린 것이 매미의 껍질이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다시 다가가서 매미의 허물을 긴 시선으로 응시해 보았습니다. 징그럽게만 느껴지던 허물들이 생명의 탄생과 맞물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왜 나무들은 빈 허물을 아직도 붙들고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매미는 나무껍질 속에 알을 낳아 놓고 생을 마무리하니 새끼는 어미 얼굴 한번 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어미와 새끼 사이에 나무가 있었다는 생각. 7년 동안 나무는 어미 대신 새끼를 키우고 있었을 겁니다. 대신 업어주면서 새끼가 어른이 되는 탄생의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매미가 나무를 꽉 붙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무를 모성의 대상으로 보니, 나무가 매미를 붙들어주었다는 것으로 생각이 전환되었습니다. 어미는 자식이 날아갔는데도 놓지 못하고 빈 방을 바라봅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때까지 나무는 일부러 허물을 놓지는 않습니다. 어른이 된 매미는 또 나무를 잊지 않고 찾아와 맴맴 울어대니까요. 아니, 매미도 귀뚜라미처럼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미는 울림판을 떨어서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사랑을 위한 세레나데가 울음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시를 공부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나를 벗어난 주변을 봅니다.
시를 쓰는 일은 타자를 만나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징그럽던 허물이 따뜻하게 느껴질 때까지 오랫동안 응시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얼마나 나는 나 밖에 모르던 바보였던가요.
항상 내 안에 내가 꽉 들어차서 주변에 무관심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첫 눈길을 줍니다.
나무와 꽃과 풀과.
평범했던 주변을, 나를 바라봐주던 주변을.
항상 있었지만, 나 밖에 보지 못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미안해지고. 고마워졌습니다.
결국,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뜻한 불빛을 차갑게 보는 것은 나의 눈이었습니다.
시를 쓰는 길은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히, 내가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주옥같은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마다 겸손해집니다. 그들의 따뜻한 시선이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알게 된 일은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세상을 보는 길에 들어서지도 못했을 테지요.
매미는 도시의 불빛과 소음 때문에 더 시끄럽게 소리를 냅니다. 사람들은 매미 때문에 잠을 설치고 매미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칩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깜박 잠이 든 매미는 서너 시간밖에 잠을 못 자고 또 이른 아침부터 소리를 냅니다. 매미는 잠을 못 잤겠구나. 본능의 목적을 위해 매미는 치열하게 짧은 생을 살다 가는 것이겠구나. 매미보다 긴 세월을 살아가는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매미는 짧은 생을 살다 간 것이겠구나. 나무는 어쩌면 그런 매미가 안쓰러워 남는 손을 꺼내서 허황된 불빛과 소음까지도 붙들어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