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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Aug 17. 2022

기억의 사소한 방식


유년의 한쪽 모서리가 접힌 책장(冊張)에서 손가락 끝으로
기억을 한 줄 한 줄 더듬어 읽는다

어느 행에선가
늘어진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각기 다른 우정과 꿈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온기 품은 저녁 뒤쪽으로 사라져 가고
어스름한 초승달의 비릿한 내음만 과거를 불러오는데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헤매는 손끝에는 잃어버린 단어만이 딸려 온다

단어를 잃어버리면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지고

설명 할길 없어진 과거는 고장 난 골짜기에서
잃어버린 단어들을 건져 올린다

감흥이 없어진 어느 한 문장을 붙들고 미아가 된 감정을 교열하는 일처럼
그랬던가 싶은
문장 속 뚫린 구멍에 그때를 붙잡아, 넣어 보는 것이다

살을 맞대고 멈춘 적 없는 얇은 책장과 책장 사이처럼
일 초 같은 하루와 하루 같은 한 시간을
깊은숨과 얕은 숨으로 단어마다 그림자를 만들며
제 몸의 문장을 기록해 왔을 텐데

밑줄 하나 그어지지 않은 책장을 넘기며
일 년이 하루로 압축된 책장을 펼친다

밤새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비바람을 맞아야 했던 나무처럼
혼자인 것 같던 밤과
젖은 흔적 지우지 못해 자신보다 짙어진 빛깔로 버티던 한 낮

선명해질수록 왜 그랬지 와 무엇 때문에 에
손가락을 베이면서도
난독증이 걸린 사람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손끝으로 훑으며
잃어버리고 싶지만 잃고 싶지 않은 것처럼
잃어버려지지 않는 단어집의 무게에 한숨을 부려 놓는다

뾰족한 삼각형 모양으로 접힌 모서리를 펼치면
사소할 것 같던 그때는 접혔던 자국에 매달려 희미해져 가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으나 잃어버린 단어들을 부둥켜안으며
오래되어 쿰쿰한 익숙한 냄새에 얼굴을 파묻어 보는 것이다

누렇게 변색된 책장의 한 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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