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밤이었다. 힘겹게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옅은 전등 빛이 들어왔다. 오랜 시간 어둠에 갇혀 있던 터라 어둑한 병실도 눈이 부셨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흐릿한 두 개의 형체가 점점 또렷해졌다. 엄마와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의식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지 감각이 곤두서있었다. 메마르고 거친 엄마의 살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랜 시간 마주했던 익숙한 아픔, 죄책감 그리고 슬픔이 온몸에 퍼져갔다.
‘엄마의 손이 이렇게 된 건 나 때문이지. 나를 키우느라. 아버지를 견디느라.’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엄마가 먼저 말씀하셨다. 흔들리는 목소리는 울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네가 이러면 엄마가 어떻게 살아. 너 때문에 살았는데.”
자살에 실패하고 만 하루 만에 깨어난 나에게 엄마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말이었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수 없어서 이혼하지 못했다, 자식까지 속 썩이면 못 산다, 자식만 보고 산다, 보란 듯이 너희가 잘 커야 한다. 이런 말 중 하나.
내 존재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던, 나를 옥죄이던 말을 그 순간에 듣게 되자 온몸이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엄마의 삶을 동정하면서도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던 마음,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렸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반항 한번 없이 자랐던 나는 처음으로 엄마를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제발 그 말 좀 그만해! 제발!”
엄마 뒤에서 초라하게 서 있던 남편에게도 원망의 말을 쏟아 냈다.
“왜 나를 살렸어? 왜? 죽게 놔두지!”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 치며 온몸으로 괴로움을 표현했다. 간호사가 달려왔고, 광분한 나를 진정시킬 방법은 약물밖에 없었다. 링거 줄을 통해 내 몸에 주사약이 들어왔고 잠시 후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엄마는 병실에 없었다.
그 후로 수개월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 엄마와의 일시적 단절은 의사의 처방이었다. 의사는 엄마가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날, 나는 병원에서 다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고, 살림을 부술 때마다 그토록 죽고 싶어 하던 내가 드디어 죽어 본 것이다. 눈을 떴을 때는 유서를 쓰고 죽음을 실행에 옮긴 내가 무섭기도 했지만, 오래도록 갈망하던 일을 하고야 말았다는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가정에서 직접적인 학대를 당한 청소년보다 부부간 폭력을 목격하며 자란 청소년들이 자살 생각을 더 많이 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 있다. 나도 1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막연히 죽음을 품게 되었다. 술주정뱅이에 난폭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맞고 살며 내게 기대었던 엄마, 가난.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죽어야 비로소 끝날 것 같았다. 그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나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줄 수 있을 거야, 내가 죽으면 아버지가 뉘우치고 더는 엄마를 때리지 않겠지, 이런 생각들을 끊임없이 했었다.
다시 태어난 만큼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동료들의 배려와 지인들의 응원을 받으며 치료에 더욱 신경 쓰고 약도 꾸준히 먹었다.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었다. 과거의 상처들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되려 선명해지는 아픔도 있었고, 묵혀놨던 분노가 예고 없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수없이 넘어지고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예전과 달리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곁에서 손잡아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제나 따스했던 남편 품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 갔다.
나는 이제 과거의 시간이 사무치게 아프지 않다. 서럽지도 않다. 오히려 나의 이야기를 꺼내어 비슷한 아픔이 있는 이들과 나누고 싶다. 상처의 연대를 통해 우리 같이 잘 살자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