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 겨우 한두 해 살면서 겪었던 일은 남겨진 사진과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기억된다. 분명 보았고 들었지만, 뇌의 미숙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런 채로 두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불행의 장면들 같은 것.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엄마에게 들어서 기억으로 남게 된 이야기들은 가슴에 깊이 새겨져 버렸다.
매서웠던 겨울의 밤. 엄마는 신생아였던 나를 포대기로 업고 밤거리를 서성였다. 혹여나 찬바람이 아기 코에 들까 싶어 이불을 폭 뒤집어씌웠다. 급하게 신고 나온 고무 슬리퍼 안에서 엄마의 맨발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추운지 모르고 내가 잠들기만을 바라며 동네를 걸었다. 걷다 걷다 새벽의 어디쯤 왔을까. 등에 업힌 내가 잠들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 나를 누였다. 나는 이내 깨어나 울었다. 그러면 자고 있던 아버지는 화를 냈다. 어떤 날은 시끄럽다며 갓난아기인 나를 방바닥에 내던지기도 했다. 운다고. 고작 그 이유로.
엄마는 다시 깊은 어둠으로 나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적막 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등에 업힌 내게 말했다. 내가 널 지킬 수 있을까.
아버지가 성내지 않도록 매일 나를 업고 밤거리를 거닐었던 엄마. 겨우 스물셋이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려온다. 그 밤의 공기가 살결에 스미는 듯 몸서리치게 된다. 검붉게 얼어가던 엄마의 발에, 손에 입김을 불어 주고 싶다.
어떤 날은 조금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네가 두세 살쯤 됐을 때야. 네 아빠가 또 술 마시고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려고 했지. 얼른 너를 업고 도망치려는데 아빠한테 한쪽 손목을 잡히고 말았어. 마르고 골골거리는 사람이 술만 마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도저히 손을 뺄 수 없더라고. 그때 바닥에 뒹구는 빗자루가 보였어. 빗자루를 집어 들고 냅다 네 아빠를 내리쳤지. 그러고는 도망쳐 나왔어. 한밤중에 너를 데리고 어디에 숨어야 할지 막막하더라. 그러다 미자 아줌마네로 가게 되었어. 미자 아줌마는 우리를 다락방에 숨겨주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 소리가 들렸어. 이집 저집 우리를 찾으러 다니다 미자 아줌마네도 온 거야. 엄마는 너를 꽉 움켜 안고 다락방에 숨죽여 있었어. 행여나 네가 울기 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 다행히 우린 들키지 않았고 무사히 다락방에서 내려왔어. 근데 미자 아줌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더라고. 아빠 손에 부엌칼이 들려있더래. 네 아빠는 부엌칼을 들고 밤새 우리를 찾아 동네를 헤매고 다녔어.”
그날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면 집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와 동생도 나갈 수 없었다. 어린 우리는 가만 서서 모든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 여전히 기억되는 날들이 있다.
엄마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지 않았던 이유, 이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오랜 시간 궁금해했다. 엄마가 내게 준 대답은 자식을 아비 없는 애들로 키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부모의 부재는 사회에 나가 무시당하기 좋은 조건이고, 결혼할 때도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속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고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를 내 인생의 약점이라 여겼다. 물론 아버지와 이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엄마가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던 중 엄마를 떠올리게 되는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엄마의 선택이 생존을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직장에서 실시하는 가정폭력 예방 교육 동영상을 보던 중이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나와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했던 질문 중에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왜 남편을 떠나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고. 그 질문 안에는 ‘떠나지 않은 여자의 잘못’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했다. 더 충격적인 말은 가정폭력 살해의 70% 이상이 피해자가 가해자와 관계를 끝냈을 때 일어난다는 말이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되돌리기를 했다. 다시 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가슴이 죄어 왔다.
가정폭력의 마지막 단계는 죽음이다. 폭력 남편에게서 벗어나는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을, 아내들은 알고 있었다. 나의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 엄마는 문을 걸어 잠갔고, 아버지를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2차 가해자가 되지 않았을 텐데.
가정폭력의 피해자라 생각했던 나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면서 그전까지 속으로만 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보낸 적도 몇 번 있었다.
“왜 맞고 살았어? 아빠가 돈벌이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었잖아. 왜 아빠를 떠나지 않았어? 우리한테 아빠가 필요해서? 난 아빠가 필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아빠 없이 자랐다면 더 건강했을 거야.”
그 말을 들으며 엄마는 얼마나 아프고 서러웠을까.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삼켰을까.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쏟아 냈던 내가 끔찍했다. 남편을 떠나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무서워서, 살고 싶어서 떠나지 못했음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날 이후 나는 용기를 모으고 있다. 엄마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차곡차곡 마음을 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