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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Aug 31. 2023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엄마에게 들려줄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 겨우 한두 해 살면서 겪었던 일은 남겨진 사진과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기억된다. 분명 보았고 들었지만 기억할 수 없는 순간들. 그런 것 중에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조금 나았을까 싶은 것도 있다.     


매서웠던 겨울의 밤. 엄마는 포대기로 나를 업고 밤거리를 서성였다. 혹여나 찬바람이 내 코에 들까 싶어 이불을 폭 뒤집어씌웠다. 급하게 신고 나온 고무 슬리퍼 안에서 엄마의 맨발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추운지 모르고 내가 잠들기만을 바라며 동네를 걸었다. 걷다 걷다 새벽의 어디쯤 왔을까. 등에 업힌 내가 잠들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 나를 누였다. 나는 이내 깨어나 울었다. 그러면 자고 있던 아빠는 화를 냈다. 어떤 날은 시끄럽다며 갓난아기인 나를 방바닥에 내던지기도 했단다. 운다고. 고작 그 이유로.     


엄마는 다시 깊은 어둠으로 나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야, 날이 춥구나.

아이야, 아이야, 울지 마라.

아이야, 내가 널 지킬 수 있을까.      


아빠가 성내지 않도록 매일 같이 나를 업고 밤거리를 거닐었던 엄마. 겨우 스물셋이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려온다. 그 밤의 공기가 살결에 스며 몸서리치게 된다. 검붉게 얼어가던 엄마의 발에, 손에 입김을 불어 주고 싶다. 호. 호.          


어떤 날은 조금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네가 두세 살쯤일 거야. 네 아빠가 또 술 마시고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려고 했지. 얼른 너를 업고 망쳐 나가려는데 아빠한테 한쪽 손목을 잡히고 말았어. 마르고 골골거리는 사람이 술만 마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도저히 손을 뺄 수 없더라고. 그때 바닥에 뒹구는 빗자루가 보였어. 빗자루를 집어 들고 냅다 네 아빠를 내리쳤지. 그러고는도망쳐 나왔어. 한밤중에 너를 데리고 어디에 숨어야 할지 막막하더라. 그러다 미자 아줌마네로 가게 되었어. 미자 아줌마는 우리를 다락방에 숨겨주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 소리가 들렸어. 이집 저집 우리를 찾으러 다니다 미자 아줌마네도 온 거야. 엄마는 너를 꽉 움켜 안고 다락방에 숨죽여 있었어. 행여나 네가 울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다행히 우린 들키지 않았고 무사히 다락방에서 내려왔어. 근데 미자 아줌마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더라고. 아빠 손에 부엌칼이 들려있었던 거야. 네 아빠는 부엌칼을 들고 밤새 우리를 찾아 동네를 헤매고 다녔어.”      


그날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면 집 안에서 문을 잠갔다.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와 동생도 나가지 못했다. 가만 서서 모든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엄마가 도망치지 않은 이유를 오랜 시간 궁금해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엄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직장에서 실시하는 가정폭력 예방 교육 동영상을 시청하던 중이었다.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들이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느 피해 여성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되돌리기를 했다. 다시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가슴이 죄어 왔다.      


가정폭력의 마지막 단계는 죽음이었다. 폭력 남편에게서 벗어나는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을, 아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엄마도 그랬다. 그래서 엄마는 문을 걸어 잠갔고, 아빠를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2차 가해자가 되지 않았을 텐데.

왜 맞고 살았냐고, 어째서 아빠를 떠나지 않았냐고,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쏟아 냈던 내가 밉고 싫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용기를 모으고 있다. 엄마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차곡차곡 마음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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