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친정 식구들과 특별한 이벤트를 했다. 일명 ‘딸 부잣집 가족 게임’. SNS에 돌아다니는 가족 게임 영상을 본 동생이 우리에게 딱이라며 제안했다. 영상 속에는 친정엄마와 딸 셋이 등장한다. 나란히 선 딸들 앞에는 물이 담긴 세숫대야가 놓여있고, 딸들은 허리를 숙여 얼굴을 세숫대야 가까이에 대고 있었다. 사위가 질문하면 친정엄마가 질문에 해당하는 딸의 머리를 눌러 물을 먹이는 게임이다.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딸만 넷이니 더 재미있을 터였다. 식사를 마치고 게임을 시작했다. 엄마는 무척이나 즐거워하셨고, 나는 물을 먹으며 눈물을 참았다.
엄마가 나를 물에 담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눈물이 가장 많은 딸은?
술주정 꼴 보기 싫은 딸은?(이건 좀 억울하다. 13년 전에 딱 한 번이었는데.)
가장 아픈 손가락인 딸은?
가장 키우기 힘들었던 딸은?
다시 태어나면 내 엄마가 되었으면 하는 딸은?
나와 엄마의 서사를 알고 있는 지인들은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났다고 한다. 모든 질문이 뭉클했겠지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여운이 가장 길게 남았을 것 같다. 나도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 엄마 내 딸 하자.” 진심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의 엄마가 되어, 넘칠 만큼의 사랑을 주고 싶다. 모진 세상에 던져진 엄마를 지켜내고 싶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난과 남편의 폭력으로 몸도 마음도 고단했던 엄마는 큰 딸인 내게 지친 인생을 기대었다. 어린 나를 붙잡고 주문을 걸듯 말씀하셨다. “엄마한테는 너밖에 없어. 너까지 속 썩이면 엄마는 못 살아.” 그늘지고 힘겨워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서 나오는 말들은 나를 엄마 인생에 단단히 묶어 두게 했다.
자신의 삶도 버거웠던 엄마는 자식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녹록지 않은 생활과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늘 차가운 눈빛과 성난 목소리로 나를 대했다. 한 번도 배를 곯아 본 적은 없지만, 마음은 언제나 허기졌다. 나는 자라는 내내 마음이 시렸고,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두기만 했다. 내 눈에도 엄마에게는 나밖에 없어 보였으니까. 그때 나는 엄마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난 엄마가 바라는 대로 착하게 자랐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엄마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착하게 커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말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엄마의 감정을 살피며 같이 울고 같이 아파했다.
엄마가 나이고 내가 엄마인 채로 30년을 살다가 결혼했다. 엄마의 품을 벗어나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하던 순간에 오랫동안 가슴에 쌓아 두었던 상처가 불현듯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부모님이 쳐 놓은 높은 울타리를 벗어나 진짜 내 모습을 조금씩 알아가던 참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고, 누구보다 가깝고 애달팠던 엄마에 대한 마음에 균열이 일어났다. 애처롭고 안쓰러웠던 엄마가 돌연 미워졌다. 왜 그토록 맞고 살았는지, 우리를 데리고 도망갈 용기는 없었는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어쩌자고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지, 나는 아버지가 필요 없었는데 왜 자꾸만 나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했는지. 엄마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는 그 감정이 더욱 심해져 괴로웠다. 자식은 이토록 예쁘고 소중한 존재인데, 부모님은 왜 나를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했을까. 왜 나에게 상처를 주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것일까. 화가 났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 깊숙이에서 서러움이 올라왔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기에 별스럽지 않았지만,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이 변해버리자 당황스러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마움과 미움이 내 몸을 들락거렸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자주 가던 동네 책방에서 <영화와 그림책으로 본 ‘엄마와 나’>라는 주제로 워크숍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4주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매주 정해진 영화와 그림책을 보며 엄마와 나, 나와 자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사회적 구조와 인식에 대해 사유하고 각자의 경험을 나눴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딸인 참가자들은 매번 울었다. 나의 상처가 아파서, 몰랐던 엄마의 삶이 보여서.
영화와 그림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와 ‘엄마’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해 주고자 다가갔다. 4주라는 짧은 기간의 프로그램이었지만,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엄마를 내 엄마가 아닌, 고유한 인격체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엄마도 상처투성이의 한 여자일 뿐이었다. 나와는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상처를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살아온 엄마. 제대로 된 보살핌조차 받지 못한 채 겨우 스물셋에 나를 낳아 엄마가 된, 세상에 기댈 곳이라곤 때리는 남편밖에 없었던 우리 엄마 용순 씨가 처음으로 내 눈에 보였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는 스물셋. 스물셋의 나는 대학생이었다. 만족할 만큼의 시기를 보낸 건 아니지만 나름의 청춘을 즐기며 푸르른 시간을 보냈다. 졸업 후에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자상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지금은 보석 같은 아이의 엄마가 되어 매일 감사하며, 하고 싶은 일 대부분을 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모든 것을 엄마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엄마가 원한 것도, 엄마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엄마를 향했던 원망과 날 선 마음들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엄마에 대한 미안하고 아픈 마음 때문에 한동안은 통화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눈물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한 사랑의 모습이 아니었다며 엄마가 준 사랑을 가벼이 여기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나. 엄마의 망가진 몸과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지금의 내 환경이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내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한 편씩 글이 쌓이면서 과거가 정돈되자 마음에 공간이 생겼다. 비워진 마음은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게 했고, 엄마가 나에게 준 사랑과 나로 인해 아팠을 엄마의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늦지 않게 알게 되어 감사한 일이다. 아직 내 곁에 엄마가 있으니. 엄마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었으니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