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을 수, 빛날 경. 수경. 내 이름이다. 1980년대 초, 입에 넣을 쌀도 없었던 엄마는 어디서 쌀 한 가마니를 구해와 철학관으로 갔다. 갓 태어난 딸 이름을 짓기 위해서였다. 숫기 없던 스물셋의 엄마는 품에 안겨 자고 있던 나를 보며 비장하면서도 간절하게 말했다.
“선생님 될 수 있는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나는 정말 선생이 되었다. 사주와 작명 때문이었는지, 엄마의 꿈을 대신 이뤄야 한다는 강박 덕분이었는지 여하튼 아이들을 가르치며 밥벌이하고 있다.
엄마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들어왔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보며 꿈이란 걸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고 한다. 긴 생머리를 곱게 반묶음하고, 말끔한 양장에 매끈한 구두를 신은 선생님은 엄마 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고운 목소리로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 “이담에 크면 저도 선생님이 될 거예요.” 말하면, 선생님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엄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용순이는 배움이 빠르니까 꼭 선생님이 될 거야.”
엄마는 선생님이 계시는 학교에 가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게 노는 것보다 즐거웠다고 한다. 유난히도 학교 가기를 좋아했던 엄마는 그때가 배움의 마지막 시기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사기를 당하면서 온 가족이 대전에서 서울로 야반도주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리고, 전학을 위한 어떤 절차도 밟지 못한 채 살던 곳을 조용히 떠나며 엄마는 많이 울었다. 외할머니는 자리 잡는 대로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엄마를 달랬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엄마의 부모님은 연고도 없는 서울 생활이 힘들기만 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해 엄마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등교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나는 언제쯤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은 흐르고 외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매일 술을 마셨다. 막내 외삼촌을 임신해서 배가 불러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늘 술에 젖어 살았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자식들이 먹어야 할 쌀을 들고 나가 술로 바꿔 마시기도 했다. 막내 외삼촌을 낳고 나서도 술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고, 전에 없던 이상한 행동마저 나타났다. 글자도 모르는 분이 종이에 붉은색으로 한자를 쓰고는 부적이라며 여기저기 붙이고 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덕거렸다. 아무개네 엄마 신들렸다고. 결국 외할머니는 막내 외삼촌을 낳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때가 엄마 나이 열넷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학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첫돌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를 키워야 했고, 이미 어린 동생 둘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불행은 엄마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연이어 찾아왔다. 몇 개월 후 외할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운전 일을 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사람을 치었고, 당시 보험 제도가 지금 같지 않아서 구치소에 수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되었다. 어린 엄마는 더 어린 동생 셋을 먹여 살려야 했다.
동생들이 모두 잠들면, 전기가 끊긴 방에 촛불을 켜 놓고 쪽잠을 자며 일했다. 어린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엄마는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셨다. “동네에 가발 공장이 있었어. 거기 다니는 아저씨가 가발을 한 무더기 가져다주면 가발에서 머리카락을 뜯어내는 게 내가 하는 일이었어.” 배냇저고리 뜨는 일도 하셨다. 학교에 가는 대신 동네 아줌마들 틈바구니에서 젓가락을 들고 어깨너머로 배운 뜨개질이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었다. 저고리 한 개를 완성하면 60원을 받았다고, 50년도 지난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하룻밤에 서너 개씩 만들어서 아침이 되면 공장에 가져다줬다. 받은 돈으로 보리쌀을 사와 밥을 지어 동생들을 먹였다. 거친 보리쌀을 먹기에는 너무 어렸던 막내 동생에게는 미음을 쒀서 먹이며 키웠다. 엄마는 막내 외삼촌을 유난히 애달파 하셨다. 태어나 엄마 젖도 못 물어본 불쌍한 애라며. (엄마에게 자식이나 다름없었던 막내 외삼촌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어린 자식 셋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출소한 후 잠시 야학에 다녔다. 배우고 싶었다. 배워서 선생이 되어 교탁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낮엔 돈을 벌고 밤엔 공부하며 모진 시간을 버텼다. 그러나 세상은 엄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우셨고, 엄마는 더 이상 배움에 욕심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에 먹고 사는 일이 시급했다.
엄마는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밤낮없이 일해 봤자 손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고 몸만 고되었다. 허드렛일하며 멸시당하고 남편에게 맞으면서 생각했다. 초등학교라도 졸업했다면,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은 갓 태어난 나를 보며 이를 악물게 했다. 너는 나와 달라야 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너는 편히 살도록 할 거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눈물 많고 여렸던 엄마는 자신이 품었던 꿈은 버리고 자식의 꿈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오셨다. 없는 형편에도 자식들 학업에는 지장이 없도록 덜 먹고 덜 쓰고 덜 자면서 일하셨다. 궁상맞게 사는 엄마가 창피하고 못마땅한 때도 있었지만 그런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되지 못한 엄마는 학교로 출근하는 동생과 나를 보며 오래전 엄마의 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되지 못했지만, 두 딸이 선생님이 되었어요. 이만하면 저 잘 살아낸 거죠?’ 고되고 남루한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꿈을 이룬 셈이라며 엄마는 만족해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