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을 마련했던 동네에 나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3층 새댁이 자살 기도했는데 남편과 자주 싸웠다더라, 밤만 되면 밖을 서성이며 울고 다니는 걸 봤다, 교사라던데 애들 위험한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들과 힐끔거리는 눈빛이 불편해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친정 근처로 이사하던 날, 집에서 여러 개의 부적이 발견되었다. 침대 밑, 배게 속, 옷장, 신발장에서. 남편을 불러 부적에 대해 물었다. 남편은 멋쩍게 웃으며 “아, 이거 장모님이….” 이사가 끝난 후 남편에게 부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유서를 쓰고 병원에 실려 가던 날, 엄마는 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면서 어딘가에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우리 큰애, 수경이 좀 살려주세요.”
할아버지는 엄마가 다니는 점집의 무속인이시다. 그분은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기도를 올렸다. 잠시 후, 내가 무사히 깨어날 수 있다는 응답을 받았다.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할아버지와 함께 산속 굿당에 올라갔다. 내가 응급실에서 위세척하는 동안 엄마는 굿을 했다. 자그만 치 500만 원짜리 굿이었다.
“뭐? 굿을 했다고? 500만 원씩이나 주고?”
“응, 그때 장모님께서 받아 오신 부적이야. 자기한테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
남편은 처음에 거절했다고 한다. 내가 알기라도 하면 난리 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부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단다. 남편이 부적을 받은 이유는 내가 좋아질 거라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엄마를 위해서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뭐라도 해야 버틸 수 있는 부모의 마음을 남편은 알고 있었다. 당시 아이 없이 살던 우리였는데, 남편은 어떻게 그 마음을 알았을까.
남편이 만류했지만 당장 엄마에게 전화했다.
“나 병원에 실려 가던 날, 500만 원짜리 굿했다면서?”
“응. 너 귀신에 씌어서 그런 거래. 굿하고 나서 지금 많이 좋아졌잖아.”
귀신이라니. 여전히 엄마는 내가 받은 상처를 모르는구나. 지옥 같았던 시간이 새겨놓은 상처가 아파서 몸부림치는 것을 귀신 탓으로 돌리다니. 마음이 까끌거렸다.
“엄마, 나 아픈 거야. 귀신 그런 거 아니라고. 왜 엄한 곳에 돈을 쓰고 그랬어. 한두 푼도 아니고.”
“너만 괜찮아진다면 엄만 그깟 돈 아깝지 않아.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살았는데….”
나 때문에 희생하며 살았다는 말,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던 그 말. 가슴이 컥컥 막혔다.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부모 잘못이다, 미안하다. 이 말이면 될 것을 힘들게 번 돈으로 굿판을 벌였다는 게 어이없고 속상하고 답답했다. 더 이야기하다간 남편과의 약속을 깨버리고 엄마한테 화낼 것만 같았다.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대충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시의 엄마는 내 상처와 아픔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정신과에 다니고 있는 내게 줄곧 말씀하셨다. 나보다 더한 환경에서 자란 애들도 멀쩡히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러냐고. 내가 마음이 여려서 그런 거라고. 강하게 마음먹으라고. 이런 말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때는 나의 상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하고 서운했다.
아버지는 병들어서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버거워했다. 하루하루를 멍한 표정으로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사과, 해명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는 달랐다. 엄마만이라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엄마는 외면했다. 내게는 선명한 상처가 있는데, 정작 상처를 준 부모님이 그걸 몰라주었다. 늘 마음 한편에 과거의 찌꺼기들을 그득 쌓아놓고 사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툭하면 튀어나와 삶을 흔들어대곤 했다.
언제까지고 남아있을 것만 같았던 각진 감정이 둥그레지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부터였다. 남편 품안에서 방황을 끝내고, 글을 쓰며 상처를 보듬고,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그때의 엄마 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500만 원짜리 굿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자,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사랑의 모습은 사람마다 제작기 다를 텐데, 내가 생각한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엄마의 사랑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내 아픔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했으면서, 나 역시 엄마의 사랑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10년을 지나오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때의 엄마 상황이 뒤늦게 헤아려졌다.
매서운 2월, 추운지도 모르고 거친 산길을 따라 법당에 올라갔던 엄마. 어느 무당의 굿하는 모습을 보며 엎드려 통곡했던 엄마. 때리는 남편 대신 평생을 바라보고 의지했던 큰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일은 엄마가 살아온 시간을 부정당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무엇을 위해 그 고생을 감내했던가. 잘 키우고 싶었는데. 나처럼 살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며 차디찬 굿당에서 가슴 치며 울었을 것이다.
엄마는 모진 시간을 함께 건너온, 애틋하기만 한 큰딸의 상처를 몰라서 외면한 게 아니었다. 인정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나 때문이야, 내 잘못이야, 인정하는 순간 엄마는 무너졌을 것이다. 엄마에게는 무너지지 않고 버텨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도 키워야 할 어린 자식들과 책임져야 할 병든 남편이그 이유였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키려 했다. 그게 엄마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자살 시도 후 10년이 지났음에도 엄마는 여전히 마음을 졸이신다. 종종 남편에게 내 안부를 확인하고, 내가 밤늦게 전화라도 하면 놀란 목소리로 긴장하신다. 그런 엄마에게 웃으며 말한다.
“엄마, 염려 마. 나 지금은 오래 못 살까 봐 걱정이야. 시원이 결혼하는 것까지만 딱 봤으면 좋겠는데. 엄마도 그때까지 건강히 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