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1 때 처음 태권도장에 간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가을이었다. 나는 청바지에 주황색 남방 그리고 청조끼를 입고 있었다. 태권도장은 운동하는 곳, 공부하는 교실, 사무실, 탈의실. 이렇게 네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내가 간 시간은 초등부 타임이었고, 중학생들은 교실에서 각자 공부하는 중이었다. 관장님은 나를 데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집중!” 이 한마디에 공부하고 있던 또래들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살면서 그렇게 얼굴이 뜨거워진 적은 처음이었다. “오늘부터 너희들과 함께 운동하고 공부할 친구다. 친절하게 잘 대해주거라. 괴롭히면 빠따다.” 군기가 바짝 든 애들은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애들 중에는 지금 내 남편이 된 형준도 있었다.
형준은 나를 처음 본 순간 왠지 나와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보다 더 숫기 없던 형준은 내게 말조차 건 적 없었고, 오히려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런 이유로 태권도장을 다닌 3년 동안 형준의 기억은 없다. 그저 조용하고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는 마른 애. 그 정도였다.
형준이 나를 몰래 좋아하고 있던 때,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던 여느 작가처럼, 나도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었다. 한 살 많은 오빠였고, 그도 나를 좋아했다. 서로 사귀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태권도장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형준을 비롯한 태권도장의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귀는 듯 사귀지 않고 스무 살을 맞았다. 조용한 사랑은 그가 군대에 가며 자연스레 끝이 났다.
스무 살이 되며 형준과 나는 종종 만났다. 함께 운동하던 동갑내기 친구들 대여섯 명과 함께. 늘 다 함께 만났다.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그 당시의 청년들이 할 만한 것들을 하며 우정을 쌓았다. 우정. 내게는 여전히 우정이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 까까머리로 군 입대를 했고, 살이 오른 모습으로 제대를 했다. 그사이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고, 11월에 임용고시를 봤다. 시험이 끝나고 합격 발표일까지는 두 달 넘는 시간이 있었다. 형준 역시 제대 후 3월 복학을 앞두고 시간이 흘러넘쳤다.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신 태권도 관장님은 우리를 불러 중학생들 그룹 과외를 제의하셨다. 우리는 그 겨울 아이들 과외를 위해 태권도장에서 매일 만났다.
10년간 친구로 지내던 우리가 연인이 된 건 나의 실패 덕분이었다. 임용고시 1차 합격 후 2차도 당연히 합격할 거라 자신만만했는데, 똑 떨어지고 말았다. 응시 지역은 달랐지만, 친한 친구들은 모두 합격했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고, 졸업시험 성적도 우수했기에 그 좌절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빨리 합격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엄마 혼자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몇 날 며칠 울기만 했다. 억울했고, 창피했고, 막막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미안했다. 원래도 희미했던 자존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 형준이 내 옆에 있어 주었다. 형준은 매일 내게 말을 걸었다 MSN 메신저로. 띵동.
-유수~ 뭐 하냐?
-그냥 있지 뭐.
-아 심심하다. 할일 없으면 나랑 놀자.
우리는 한게임에 접속해 테트리스를 하며 놀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게임이 테트리스밖에 없어서였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게임을 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되었다. 졸음이 쏟아져 그만 자야겠다고 인사할 때쯤 형준은 말했다.
-괜찮냐? 울지 말고 잘 자라.
거창한 위로의 말도, 힘이 되는 응원의 말도 없었지만, 형준의 마음이 느껴졌다. 형준은 매일 밤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썼다. 좋아하지도 않는 시시한 테트리스를 하면서. 티 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나를 쓰다듬어 주던 형준이었다.
어영부영 3월이 되었고, 형준은 복학해서 1호선과 7호선을 갈아타며 학교에 다녔다. 나는 임용고시 재수생으로 1호선을 타고 노량진 학원가로 들어갔다. 우리는 각자의 수업을 마치고 수원으로 돌아갈 때,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만났다. 노량진에서 먼저 전철을 탄 나는 몇 번 칸에 탔는지 형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15분 후,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도착하면 내가 서 있던 전철 칸의 문이 열리고 형준이 헤벌쭉 웃으며 전철 안으로 들어왔다. 전철에 들어서자마자 내 어깨에 들린 가방을 자신의 어깨로 옮기고는 종알종알 일과를 보고했다.
그렇게 매일 만나던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고단하고 퍽퍽한 동네 노량진. 그곳에서 에너지를 다 쓰고 1호선 전철에 올라타면 충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형준을 만나면 그날의 힘듦이 풀어졌다. 흔들리는 전철 안. 사람들로 촘촘히 채워진 좁은 공간에서 치이고 부대꼈지만, 형준이 손잡아 주어서 좋았다.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만나는 걸 반대했다. 엄마, 관장님, 선배, 친구들도 모두. 그건 우리를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 둘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이유였다.
나는 네 자매의 장녀, 형준은 5남매의 막내였다. 우리는 우리보다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를 만나본 적이 없다. 두 집 모두 가난했고, 양 가정의 아버지들은 편찮으셨다. 가난하고 가족 많고 환자까지 있는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어려움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고 걱정하는 부분을 정작 우리만 몰랐다.
내가 형준과 6년을 만나는 동안 엄마는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친구로 건전하게 지내라고. 그 말에는 결혼은 안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음을 나도 형준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났다. 그리고 엄마는 조용한 반대를 포기했다. 6년간 형준을 지켜보며 반듯하고 착한 성품 앞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형준은 긴 연애를 끝내고 부부가 되었다.
결혼하고 반년 만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반년 후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정신과에 다니며 약물에 의지해 꾸역꾸역 살았지만 30년 동안 쌓였던 과거의 응어리들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곪은 상처를 마주하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은 가혹했고 과거에 묶인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속절없이 흔들리던 삶이라는 전철 안에서 형준에게 매달려 버텼다. 넘어지고 지쳐 쓰러지면 다시 일어섰다. 주저앉은 나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잡아 주던 형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무얼 하든 다 괜찮다고,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살아만 달라고 말하던 형준이 나를 낫게 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흔들림은 서서히 멈추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지하의 어둠도 밝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무던히도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단단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 흔들리던 전철 안에서 내 손을 잡아 준 사람이 형준이여서, 형준이 내 남편이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