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경 Mar 13. 2024

함께라서 감사한 오늘

 코로나가 전 세계를 장악하기 직전인 2020년 1월 16일 아침, 나는 매우 분주했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바깥의 찬 공기를 불러들였다. 전날까지 사용하던 침대보와 이불을 걷어 내고 미리 세탁해 놓은 깨끗한 침구로 새 단장을 했다. 집 안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환기를 시킨 후 식탁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전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다 눈을 뗐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들떠 있었다.

 ‘오늘이 왔구나. 드디어 오늘이 왔어.’          

 아이와 점심을 먹고 가장 예쁜 옷을 꺼내 입었다. 평소보다 공들여 화장했고 머리 손질에도 신경을 썼다. 거울 속의 나는 기분 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가슴은 쉴 새 없이 콩닥거렸다.     


 오후 3시, 인천공항으로 향하기 전 핸드폰을 열어 뉴스를 검색했다. 특별한 기사는 없었다. 안심하고 아이를 차에 태워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운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눈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야 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 입국장 앞의 벤치에 앉아 전광판만 바라보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은 없는지, 기상 상태는 어떤지 검색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일곱 살 아들은 내 주변을 빙빙 돌며 아빠는 언제 오냐는 질문만 반복했다.     


 5시 30분이 되자 중국에서 도착한 비행기 소식이 전광판에 올라왔다. 이제는 전광판 대신 꽉 쥐고 있던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보, 나 도착.          

 크게 안도하며 두 손을 모았다. 세상의 모든 신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잠시 후, 입국장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왔다. 반가워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달려가서 안기는 연인, 많은 이들의 만남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더욱 뭉클해졌다. 나도 빨리 남편을 만나고 싶었다. 또 한차례 입국장 문이 열렸을 때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캐리어가 여러 개 담긴 카트를 밀며 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빠.”     

     

 신이 나서 뛰어가는 아이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남편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편은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2년 동안 고생 많았어. 건강히 지내줘서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무사히 우리 곁에 와 줘서.”     


 2017년, 휴직하고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갔었다. 주재원을 고민하고 있던 남편에게 호기롭게 함께 가자고 했던 건 나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좀 더 품 안에서 키우고 싶었는데, 3년의 육아휴직이 끝나갈 무렵이어서 주재원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3년을 살고 한국에 돌아오면 아이는 일곱 살. 그 정도면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키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틀어졌다. 내가 중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였다. 결국 1년 만에 나와 아이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 없이 지내는 건 쉽지 않았다. 몸이 아파도 쉴 수 없었고, 주말은 출근하지 않는 평일이나 다름없었다. 직장을 다니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게 힘에 부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특히 어린이날이나 명절처럼 가족들이 함께해야 하는 날에는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더욱이 남편은 내게 단순한 의미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가장 좋을 신혼 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약에 찌들어 살았던 1년. 남편은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묵묵히 내 곁은 지켜준 사람이다. 반복되는 자해와 일탈 앞에서도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언제나 온화했다. 그게 더 아프고 미안해서 남편을 놓으려 한 적도 있었다.


 “우리 그만하자. 이혼해. 너에게 더는 추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너 없이는 내 인생도 없어.”

 “너까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내 옆에 있으면 너도 불행해질 거야. ”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지금 네 옆에 있는 사람이 나라서 오히려 감사하고 행복해. 내 옆에서 아픈 게 얼마나 다행이야. 편하게 아파해도 돼.”            


 분명 사랑이었다. 진심이었다. 남편은 내가 편히 방황하도록 따뜻하게 돌봐 주었다. 뒤늦게 겪는 나의 사춘기를 부모의 마음으로 보듬었다. 내가 무얼 하든 다 괜찮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부모님께도 받아본 적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처음으로 느껴봤다. 대가 없는 사랑이 쌓이자 제대로 살아 보고 싶다는 의지도 생겼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정제된 약보다 효과가 좋은 것이었다.

 배우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남편. 그가 없는 삶은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다. 2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무너지려 할 때는 아이를 보며 버텼다. 버티다 보니 시간은 흘렀고, 남편은 코로나보다 한발 앞서 가까스로 우리 곁에 왔다.     


 남편이 입국한 지 5일 만에 국내에서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고, 2주 후 중국은 봉쇄령을 내렸다. 자칫 우리 가족은 예정된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남편이 홀로 타국에서 확진되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거나, 중국의 삼엄한 경비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농후했던 상황을 상상하면 아찔했다.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사람의 뇌는 힘들고 불행했던 기억에 비해 즐겁고 행복했던 일을 상대적으로 쉽게 잊는다고 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남편을 기다리며 설렘 가득했던 아침, 건강하게 돌아와 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 공항에서의 감격스러운 포옹은 일상에 묻혀 자연스레 옅어져 가고 있다. 작은 일에 서운해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를 넘기지 않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안아준다. 우리가 함께 아파하고 그리워했던 시간은, 평범한 오늘 하루를 소중하고 감사히 여기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