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의 이른 아침, 휴대폰에 엄마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건 찍혀있었다. 직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장례식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울먹이며 할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을 펑펑 쏟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우는 걸 봐도 따라 우는 내가, 할머니의 죽음에 무감했다. 이런 날이 온다면 울지 않겠다고 오래전부터 다짐했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건, 5년 전이었다. 아이와 함께 친정에 갔다가 우연히 할머니와 마주쳤다. 20년 만에 만난 할머니는 백발이었다. 우리 엄마와 내게 입에 담기 어려운 욕과 악담을 퍼붓던, 절대 늙지 않을 것 같던 할머니는 힘없는 노인이 되어있었다. “수경이니? 네가 애 엄마가 다 됐구나.” 나는 고개만 살짝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오래전의 쓴 내 나는 감정들이 온몸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난 할머니를 겁내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몇 살이냐 묻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그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짐을 챙긴 후 건성으로 인사하고 문을 나서는데 할머니의 음성이 뒤따라 나왔다. “딸을 낳아야지. 아들 소용없다.” 긴장하며 떨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정신이 차려졌다. 어떤 묵직한 설움과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이 손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며 집으로 왔다. 할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딸을 낳아야 한다고? 아들 소용없다고? 맏며느리인 엄마가 딸만 낳았다고 엄마와 우리를 그토록 구박하더니 이제 와 그게 나한테 할 소리인가? 화가 치밀었다. 할머니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온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20년 넘게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들과 관계를 끊고 살던 엄마는 그분들과 과거를 정리하고 조금씩 왕래하며 지내고 계셨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 마음속 상처들이 해결되지 않아 틈틈이 괴로워하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문제를 고민했다. 나는 할머니께 사과받고 싶었다. 엄마한테 과거를 사과한 할머니가 왜 나에게는 사과하지 않는지, 왜 내 상처는 모르는지 빈정상하고 분했다. 더욱이 장례식에 가면 아버지 형제들을 만나야 했다. 그분들을 만나는 건 나에게 또 다른 괴로움이었다.
엄마와 전화를 끊고 종이를 꺼내 반으로 접었다. 한쪽에는 장례식에 가야 할 이유를, 반대쪽에는 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적어 나갔다. 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적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그 이유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내가 아버지 형제들을 보고 발작할까 봐. 또 쓰러질까 봐 겁이 난다.’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 그분들이 주는 공포의 기억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 내가 가여웠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을 붙들고 있는 내가.
나는 결국 장례식에 갔다. 엄마를 위해서였다. 엄마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거나, 예전처럼 사람들이 엄마를 막 대한다면 내가 지켜주고 싶었다. 더는 울고만 있는 어린애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할머니에 대한 예우 같은 건 없었다.
장손녀인 내가 가장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향냄새가 온몸에 꽉 들어찬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상복을 입기 위해 상주실로 가는데 영정사진 속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여라도 내가 울어버릴까 봐 염려되었다. 사람들이 내 눈물을 회한이나 슬픔으로 오해하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친척들과 어색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지켰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건 창밖을 바라보며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아서 내가 인사해야 할 문상객은 없었다. 부모님의 지인이 오시면 잠깐씩 인사하는 게 다였다.
늦은 밤, 문상객이 뜸한 시간이 되었을 때 친척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나는 어울리지 못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이름이 들려 귀를 열었다. 고모부와 엄마의 대화였다.
“수경이 어렸을 때 얼굴이 그대로 있네요.”
“쟤도 마흔이 넘었어요. 애가 벌써 4학년이에요.”
“어렸을 때 지 아버지 술 마시고 난동 부리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면서 울던 게 생각나네요. 수경이가 어렸을 때부터 마음고생 많았죠.”
“어머니는 어떻고요. 애한테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데요. 다 커서도 오랫동안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쟤 보면 마음이 아파요.”
생각지도 못한 내용의 대화에 눈이 뜨거워졌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층 로비에 앉아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슬프고 아파서가 아니었다. 그때의 가여웠던 나를 기억해 주는 게 고마워서였다.
다음 날도 조문 온 몇몇 분들의 비슷한 위로가 이어졌다. 분명 할머니의 장례식인데 그분들은 내게 와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이며 어린 네가 고생 많았다고, 이렇게 잘 커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얼어 있던 마음이 녹아 눈물로 흘러내렸다. 아무도 내 아픔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게 이토록 큰 위로가 되는지 몰랐다. 위로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상대의 힘듦을 알아주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장례 3일째, 발인과 운구를 끝내고 화장터로 갔다.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가족들은 할머니께 마지막 절을 올렸다. 장남인 아버지를 시작으로 나머지 형제분들도 차례대로 절을 했다. 한 대가 넘어가고 장손녀인 내 차례가 되었다. 장례식에 올 때만 해도 이 시간은 계획에 없었지만, 마음이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예를 갖추고 싶었다.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붙이고 무릎을 굽혀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일어나서 한 번 더 절을 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엎드린 채로 토해내듯 울었다.
“왜 (왜 그랬어요. 우리 엄마한테).”
“왜 (왜 그랬어요. 나한테).”
“왜 (대체 왜 그랬어요. 우리한테).”
가슴을 움켜쥐고 설움 범벅인 “왜”만 부르짖으며 울었다. 가슴에 박혀있던 가시를 컥컥 뱉어내었다. 아무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아무도 나의 시간을 깨뜨리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알고 있는 듯했다.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쏟아 낼만큼 쏟아낸 후 남편과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엄마는 함께 울며, 그래 이젠 됐다, 이젠 됐어, 우리 다 잊자, 하셨다. 나도 그럴 참이었다. 미움을 거둬 내는 건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한 줌 재가 되어 가고 있는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안녕히 가세요. 우리 다음에는, 다음 생이 있다면 조금 더 다정하게 만나요.’
절대로 울지 않겠다던 나는 가장 크고 서글프게 통곡했고, 누군가는 나의 눈물을 오해하기도 했다. 마음을 추스르며 쉬고 있을 때, 장례지도사가 와서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생전에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였나 봐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어떤 어르신은, 망자를 위해 곡을 해 주면 망자가 저승 가는 길이 편안하다고, 내가 좋은 일을 했다며 할머니께 큰 선물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선물. 며칠 동안 ‘선물’이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3일. 나는 그 시간을 할머니와 내가 서로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여기기로 했다. 할머니의 음성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게 사과하신 거라고 믿고 싶다. 내 통곡 역시 할머니 떠나시는 길을 편안히 했다면, 다행이라 여기며 지난 시간을 정리하기로 했다. 의미 부여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