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경 Oct 12. 2024

아버지

 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후 친정 식구들과 카페에 갔다. 나는 여느 때처럼 아버지와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휴대폰만 응시하며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더듬더듬 어눌한 말투로 나를 불렀다. “얘, 큰 애야.”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 앞으로 갔다. 아버지는 앉으라며 손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의자에 앉았다. 시선은 탁자 위에 고정했다. 검버섯이 가득 핀 쪼글쪼글한 아버지의 손이 보였다.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는 아버지는 두 손을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주름이 자글한 푸석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큰 애야, 내가 미안하다. 엄마랑 너한테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어. 정말 미안하다. 죽기 전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노모를 떠나보내며 머지않아 다가올 당신의 죽음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할머니를 화장할 때, 엎드려 설움 가득한 눈물을 토해내는 나를 보며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기도 했겠지. 나 역시 그러했으니.    

 

 예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눈물과 사과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멍한 얼굴 위로 눈물만 줄줄 흘렀다. 엄마 눈에도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수십 년간 쌓였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쓸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미움과 원망 가득했던 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단정하고 차분한 말이었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요. 저도 이제 미움 없이 살고 싶어요. 아버지도 남은 시간 평안히 지내세요.”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년 넘게 어린 시절의 상처를 헤집으며 글로 쓰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용서와 이해를 마음에 품게 된 듯하다. 쓰면서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하고 가슴 치며 울고. 다시 또 쓰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음이 평온해짐을 어렴풋이 느꼈다. 엄마 삶을 이해하게 됐듯이, 아버지에 대해서도 잠잠히 생각해 볼 여유가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5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할아버지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기 전까지는.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아버지는 다리를 크게 다쳤다. 장애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피로하거나 근육을 많이 사용하면 다리가 저렸다. 아버지는 방황했다. 삶을 비관하며 밖으로만 돌았다. 가족들은 장남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질책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일하던 아버지는 아홉 살 어린 엄마를 만나 혼인 신고만 한 채 살림을 시작했다.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았다. 가난하고 배움이 짧은 엄마와 아버지는 시작부터 삐거덕거렸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하지 못했던 효도와 장남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어렵게 번 푼돈들은 할머니에게로 흘러갔고 엄마는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부지런히 벌고 아껴서 작은 집이라도 마련하려고 애썼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 놓은 후에 효도든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의 의견은 어긋났고, 아버지는 무능력에 대한 자격지심을 술과 폭력으로 채우려 했다.      


 아버지가 지나온 시간을 더듬으며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애쓰던 중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는 생각 하나를 붙잡았다. 평생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폭력적인 언행을 자주 일삼았다. 기분에 따라 작은 일에도 크게 분노하고 화를 참지 못해 욕설을 퍼붓거나 무언가를 던지고 부수었다. 그럴 때마다 막연히 아버지는 욱하는 성격이고 화가 많은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치료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정신과에 다니며 약을 먹고 상담받았던 것처럼, 아버지도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아버지도 어쩌면 환자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아버지의 인생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건강하지 못한 몸과 무능력,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아내, 혐오와 증오를 품고 있는 자식. 아버지가 느꼈을 외로움과 서글픔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그럼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아버지가 잘못한 일이 맞다고 선을 긋게 된다.      


 아버지의 시간을 짚어보며 낯선 나를 느꼈다.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던 나였는데, 내게 생긴 변화가 새삼 신기하고도 머쓱했다. 문득, 지난겨울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학 친구 다섯 명이 꾸준히 만나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 1박으로 여행을 간다. 만나는 순간 숙소를 떠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울다 웃다 한다. 그중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귀 기울여 듣는 친구가 있는데, 상담을 공부한 가은이다. 그날도 각자 원하는 주종을 앞에 두고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고민까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쓰며 비로소 엄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여러 상황을 이젠 이해한다고. 가만 듣고 있던 가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버지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아.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이해될 수 없는 일이야. 그 시간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몰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결국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평생 미워할 거라고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은이는 깊고 잠잠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수경아. 그렇게 해.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어.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여행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가은이가 한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말은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싫다고, 여지없다고 혼잣말하면서도 내 무의식은 조용히 움직였다. 마음 한 귀퉁이에 아버지에게 내어줄 빈방 하나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제는 알고 있다. 그때 가은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말이 왜 내게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     


 가은이는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변화를, 내 마음에 힘이 생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퍼붓듯 쏟아내는 아팠던 시간을 지켜보며 나에게 있던 슬픔, 설움, 분노, 원망 같은 것들이 비워지고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내가 엄마를 온전히 이해했듯이,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때가 왔다고 느꼈던 것 같다. 가은이는 내가 한발 더 나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아버지를 평생 증오하며 살 줄 알았다. 내가 받은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글을 쓰며 나는 변화되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고발 같은 글을 쓰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쓰고 나서 알게 되었다. 미워해야 할 만큼 미워해야 용서도 할 수 있다는 걸. 울어야 할 만큼 울어야 웃을 수 있다는 걸. 글을 쓰며 마음을 정돈하지 않았다면, 가은이가 건넨 말도 할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사과도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지금 많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미워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도덕적·종교적 신념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마음껏 미워하라고. 무엇이든 자신 안에 들어있는 명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마구 쏟아내라고. 그런 후에 찾아오는 개운함과 비워지고 채워지는 마음의 변화를 가만히 느껴보기를 바란다.  

이전 29화 마지막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