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야, 내 아가. 오랜만에 불러보니까 엄마 배에 아기가 들어 있는 듯해서 배를 한번 만져봤어. 아기가 있을 리는 없고, 엄마 뱃살만 두둑하게 잡히네. 하하.
시원이 태명을 왜 뽀뽀로 지었는지 말해준 적 있지? 엄마는 시원이가 엄마 몸에 찾아오는 순간부터 엄청나게 공부했어. 선생님이 되기 위해 했던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지. 태명을 지을 때도 역시나 공부 했단다. 어디선가 봤는데, 태아가 반복되는 된소리나 거센소리를 잘 듣는다더라. 그래서 여러 된소리와 거센소리를 조합해 봤어. 많은 조합 중에 ‘뽀뽀’만큼 사랑이 흘러넘치는 태명은 없었어. 태명 때문이었는지, 너는 정말 뽀뽀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아기였어. 엄마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에 들어있는 더 작은 눈과 코, 입이 움직일 때마다 너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어. 물론 시원이가 예민하고 잠도 잘 자지 않는 아기라서 여러 날 힘들긴 했지만. 엄마가 쓴 육아일기 봤으니, 너도 알고 있지? 그런데 엄마는 시원이가 짧은 잠을 자고 예민할 때마다 힘든 것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컸어. 모든 게 엄마 때문인 것 같아서.
왜 미안했는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줄게. 시원이가 엄마를 찾아오기 전에 엄마 안에 살던 친구들이 있었어. 슬픔이, 걱정이, 불안이. 이 애들이 엄마 마음에 꽉 차있어서 시원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어. 그래서 아빠 손을 잡고 병원에 갔지. 『의사 어벤저스 12: 정신질환, 마음이 아프다』 여기에 나오는 병원으로 말이야.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약도 먹고 상담도 받으면서 치료하면 엄마를 힘들게 하는 마음속 친구들과 헤어질 수 있다고. 그래서 오랫동안 약을 먹었어. 의사 선생님과 아빠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병원에 다녔지. 그랬더니, 세상에나, 엄마가 정말로 나아진 거야. 엄마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이, 걱정이, 불안이의 몸집이 작아졌지 뭐야. ‘이제 됐구나. 이제 아가가 오기를 기다려도 되겠어.’ 하고는 엄마 몸을 극진히 보살폈어. 그리고 나서 시원이가 짠, 하고 찾아왔어. 약을 중단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서 엄마 아빠는 깜짝 놀라기도 했어. 아, 우리 아가도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엄마가 준비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생각했어.
시원이가 엄마를 잘 찾아와 줘서 고맙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먹었던 약 때문에 아픈 아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 되기도 했어. 다행히도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 엄마 품에 안겼지만, 시원이가 잠을 잘 안 자고, 사람들이 시원이를 예민한 아이라고 말하고, 시원이가 아프기라도 할 때면 엄마 때문인 것 같아서 미안했어.
엄마는 그럴수록 시원이를 더 많이 안아줬어. 어른들은 자꾸 안아주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어. 엄마가 미안한 만큼 아주 많이 안아 주고 싶었어. 엄마의 작은 가슴에 여리고 고운 너를 감싸 안고 있으면 너무도 벅찼어. 너를 위해 엄마가 안아줬다지만, 실은 시원이가 엄마를 안아준 거야. 부드럽고 뜨겁게 내 품에 안긴 너는 엄마가 잘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였어.
시원아, 엄마의 책 읽기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아니? 바로 시원이를 낳은 후부터였어. 시원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마구잡이로 찾아 읽었지. 지금도 궁금한 게 생기면 책을 통해 답을 찾듯이 그때도 그랬어. 시원이가 잘 때면 책을 읽으며 공부했어. 엄마는 정말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거든. 무엇보다 시원이가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어. 그런데 읽다 보니, 시원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엄마부터 건강해져야겠더라고.
시원이를 낳기 전에 슬픔이, 걱정이, 불안이를 작아지게 하긴 했지만, 여전히 엄마 안에 남아있었거든. 그래서 노력했어. 건강한 시원이 엄마가 되기 위해서.
엄마 혼자서는 불가능했어. 시원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빠가 옆에서 도와주셨어. 안 봐도 훤히 보이지?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잘 도와주셨을지. 엄마가 남자 하나는 잘 골랐어! 하하하. 우리 시원이도 결혼을 한다면, 아빠가 된다면, 분명 시원이 아빠처럼 다정하고 편안하고 재밌는 아빠가 될 거야. 아! 이건 육아일기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아빠가 엄마보다 시원이 기저귀를 더 잘 갈았어. 그리고 목욕시키는 일도. 엄마는 작디작은 갓난아기를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나서 발가벗은 너를 욕조에 넣지도 못했거든. 아빠는 얼마나 능숙하던지. 역시 시원이 아빠는 남달라.
엄마 아빠는 너를 만나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너를 그저 온 마음 다해 사랑하며 키우기로 했어. 서툴고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이 어린 아기가 알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
그렇게 시원이가 한 해 한 해 자라는 동안 엄마도 함께 자랐어. 시원이처럼 키도 자랐으면 좋았겠지만, 마음만 자랐지. 키가 작은 엄마는 언제나 키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마음이 자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서 마음만 자란 것도 만족해. 아주아주 대만족. 마음이 자라지 않으면 세상에 널려있는 재미있는 일들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거든.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다리나 발판을 이용해서 볼 수 있지만, 마음이 자라지 않아 보이지 않는 것들은 마음을 키울 수밖에 없어. 엄마는 어린 시절에 키만큼이나 마음이 자라지 못해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 그런데 시원이 덕분에 마음이 자란 거야. 지금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고 감사해. 그러고 보니 엄마가 시원이를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시원이가 엄마를 키운 거네.
맞아,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아이들은 어른들의 자라지 못한 마음을 키워주는 존재거든. 엄마 역시 시원이 아니었으면 자라지 못했을 거야. 엄마가 자라도록 해준 시원 님, 고맙습니다.
엄마는 요즘 생각해. 시원이를 만나기 전에 엄마가 아팠던 게 다행이라고. 감사한 일이라고. 속상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시간을 겪어 봐서 시원이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엄마가 먼저 아파봤으니까 혹시라도 시원이에게 어려움이 생긴다면 온전히 이해하고 시원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엄마의 오래전 그 시간까지도 감사하기로 했어. 시원이가 있는 삶은 무조건 감사밖에 없어. 이래서 아빠가 맨날 질투하나 보다.
이젠 엄마의 편지를 마쳐야 할 것 같아. 너무 길면 시원이가 읽다가 ‘아 졸려 워’ 할까 봐.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말할게.
시원아, 엄마는 시원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 있어. 높은 빌딩, 통장에 찍힌 어마어마한 돈이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단다. 미안 미안.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남겨 줄 수 있어. 사랑받은 기억. 시원이가 엄마 아빠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 엄마 아빠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았던 모습들. 물론 돈을 많이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거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사랑’이야. 그래서 시원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육아 일기를 썼던 거야. 그걸 알려 주고 싶어서. 지금은 한 달에 두세 번밖에 안 쓰지만, 예전에 썼던 일기를 보며 웃고 있는 시원이를 볼때마다 일기 쓰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이 편지를, 오래전 일기를 들춰보며 다시 일어섰으면 좋겠구나. 사라지지 않는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 엄마는 오늘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 볼게. 고맙다, 아가야. 사랑한다,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