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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Dec 10. 2023

우리 만남은

오래전 태권도장에서 동수를 만났을 때, 우리가 부부로 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친하지 않았던 아이가 동수였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수는 달랐다. 열네 살의 동수는 나를 처음 보던 날, 막연히 우리가 결혼하면 어떨지 상상했다고 한다.     


10년간 친구로 지내던 우리가 연인이 된 건 나의 실패 덕분이었다. 임용고시 1차 합격 후 2차도 당연히 합격할 거라 자신만만했는데, 똑 떨어지고 말았다. 응시 지역은 달랐지만, 친한 친구들은 모두 합격했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고, 졸업시험 성적도 우수했기에 그 좌절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빨리 합격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엄마 혼자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날 며칠 울기만 했다. 억울했고, 창피했고, 막막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미안했다. 원래도 희미했던 자존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 동수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 옆에 있었다. 동수는 매일 내게 말을 걸었다 .MSN메신저로. 띵동.      


-유수~ 뭐 하냐?

-그냥 있지 뭐.

-아 심심하다. 할 일 없으면 나랑 놀자.      


우리는 한게임에 접속해 테트리스를 하며 놀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게임이 테트리스밖에 없어서였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게임을 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되었다. 졸음이 쏟아져 인제 그만 자야겠다고 인사할 때쯤 동수는 말했다.      


-괜찮냐? 울지 말고 잘 자라.     

 

거창한 위로의 말도, 힘이 되는 응원의 말도 없었지만 동수의 마음이 느껴졌다. 동수는 매일 밤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쓰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시시한 테트리스를 하면서.

티 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나를 쓰다듬어 주던 동수. 그 애는 나의 차가운 계절을 포옥 안아주었다.  


그해 3월, 동수는 복학생이 되어 1호선과 7호선을 갈아타며 학교에 다녔다. 나는 임용고시 재수생으로 1호선을 타고 노량진 학원가로 들어갔다. 우리는 각자의 수업을 마치고 수원으로 돌아갈 때,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만났다. 노량진에서 먼저 전철을 탄 나는 동수에게 문자를 보낸다.     


-방금 전철 탔음. 4-2       


15분 후,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도착. 내가 서 있던 4-2번 칸의 문이 열리면 동수가 헤벌쭉 웃으며 전철 안으로 들어왔다. 전철에 들어서자마자 내 어깨에 들린 가방을 자신의 어깨로 옮기고는 종알종알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그렇게 매일 만나던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고단하고 퍽퍽한 동네 노량진. 그곳에서 에너지를 다 쓰고 1호선 전철에 올라타면 충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동수를 만나면 그날의 힘듦이 풀어졌다.

흔들리는 전철 안. 사람들로 촘촘히 채워진 좁은 공간에서 치이고 부대꼈지만, 동수와 함께 손잡고 서 있어서 좋았다.

그때 내 손을 잡아 준 사람이 동수여서,

동수가 내 남편이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는 6년의 연애를 마치고 서른에 결혼했다. 연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며 싱그러운 신혼을 보냈다. 금요일 밤에는 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봤고, 주말에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일어나 햄버거로 배를 채웠다. 돌솥에 밥을 짓다 홀랑 태워도 맛있게 먹었고, 와인 따는 데 실패해서 코르크 마개 조각들이 동동 떠다니는 와인을 마셔도 낭만적이었다. 뭘 해도, 뭘 하지 않아도 마냥 웃고 좋았다.


언제고 행복할 것만 같았던 시간은 결혼한 지 1년 만에 끝나버렸다. 우리에게 위험을 알리는 점멸등이 껌벅껌벅.

내가 아팠다. 과거의 상처 때문이었다.  

    

결혼하며 불안과 억압의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자 억눌렸던 감정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아버지에게 품었던 분노, 엄마를 향한 원망, 행복에 대한 의심, 일어나지 않은 비극적 상황에 대한 불안.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누우면 숨이 막혀서 벌떡 일어나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앉아서 쪽잠을 자거나 밤을 새우고 출근하는 날이 늘어갔다. 무언가 먹으면 절반은 게워 냈고, 이유도 없이 눈물은 줄줄 흘렀다. 순식간에 삶이 무너졌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져 정신과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약물에 의지하여 꾸역꾸역 살았지만 30년 동안 쌓였던 과거의 응어리들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곪은 상처를 마주하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은 가혹했다. 그 과정에서 반복되는 자해와 이상행동이 나타났고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과거에 묶인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속절없이 흔들리던 삶이라는 전철 안에서

나는 동수에게 매달려 버텼다. 넘어지고 지쳐 쓰러지면 다시 일어섰다. 주저앉은 나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수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무얼 하든 다 괜찮다고,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살아만 달라고 말하던 동수는 나를 낫게 했다.     


결국,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흔들림은 서서히 멈추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지하의 어둠도 밝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무던히도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단단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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