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임용고시 합격 후 첫 여름방학을 맞아 한껏 들떠 있었다. 방학 중 통장에 찍힌 월급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던 나는 남자 친구를 불러냈다. 엄마와 외삼촌이 운영하시는 가게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흥에 겨워했다.
“외삼촌, 저희 생맥주 두 잔 더 주세요.”
“야, 넌 남자 친구만 사주고 외삼촌은 안 사주냐?”
다음에 밥 한번 살게요, 하고 웃었는데 다음은 오지 않았다. 그날 외삼촌과의 대화가 마지막 대화일 줄 알았다면, 가장 좋은 음식점에서 제일 비싼 음식으로 대접했을 것이다.
다음 날, 치킨 배달을 갔던 외삼촌은 사고가 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의식 없이 병원에 3일 동안 누워 있다가 어린 자녀 셋을 남겨두고 멀리 떠나버렸다. 8남매의 막내였던 외삼촌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외가댁 식구들 모두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었고, 그중 가장 크게 아파했던 건 우리 엄마였다. 학업도 포기하고 자식처럼 키웠던 막내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엄마에게 큰 시련이었다.
오래전, 외할머니의 죽음과 외할아버지의 부재로 소녀 가장이 된 엄마는 힘듦을 자각할 수도 없을 만큼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삶을 비관할 여유도 없었다. 지금 당장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일 앞에서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동생들과 먹고 사는 일만 생각하며 10대를 보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 어렸던 동생들도 모두 자라 앞가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는 이제 엄마의 삶을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스물을 지나 안정된 돈벌이를 위해 공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아홉 살 많은 한 남자를 만났다. 잘생긴 그는 따뜻하고 친절했다. 부모의 정이 그리웠던 엄마는 그를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랐다. 고단했던 그간의 삶을 아저씨가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엄마는 아저씨와 함께 살기로 했다.
부부가 되자 아저씨의 숨겨진 모습들이 드러났다. 아저씨는 술만 마시면 엄마를 때렸고, 몇 안 되는 살림도 부수었다. 돈도 벌어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엄마는 도망가려고 했으나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마음을 접었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발목을 잡고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낳으며 희망을 품었다. ‘아이가 생겼으니, 남편의 폭력도 사라지겠지. 이 남자, 정신 차리겠지.’ 그러나 헛된 희망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여전히 일하지 않았고, 술을 많이 마셨고, 엄마를 때렸다.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의 아버지는 정 많은 사람이었다. 갈 곳 없는 막내 외삼촌이 안쓰럽다며 단칸방에 데려와 함께 살자고 했다. 내가 서너 살 때, 초등학생이었던 막내 외삼촌은 나와 놀아주는 친구 같은 외삼촌이었다. 엄마는 아들 같았던 동생을 잠시나마 품어주었던 아버지에게 고맙고 미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폭력에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맞으면서 빚진 마음을 차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외삼촌과 나는 공평하게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었다. 그사이 복잡다단한 일들로 엄마와 외삼촌의 거리는 멀어졌고, 십수 년 만에 만난 외삼촌은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외삼촌은 엄마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마음이 아팠다. 불쌍하게 자란 동생이 잘 살기를 바랐는데, 아내마저 집을 나가 버렸다.
그날 이후 엄마는 외삼촌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궁리했고, 큰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치킨 가게를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외삼촌은 중국집 배달 일을 하고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동업할 수 있었다. 2층짜리 작은 건물을 사서 1층은 치킨 가게, 2층은 외삼촌과 아이들이 거주할 수 있게 안정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가게는 매출이 꽤 좋아졌고 안정화 되어갔다. 당시 흔치 않았던 파닭이 인기가 좋아서 체인을 내 보자며 희망의 말이 오가던 중 사고가 난 것이다.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치렁치렁 의료기기를 매단 채 누워있는 외삼촌을 흔들며 말씀하셨다.
“일어나 대환아. 미안해 대환아. 누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
외삼촌은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저 어린 자식들은 어쩔 거냐고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그렇게 3일을 울다 외삼촌의 사망 선고가 내려지자, 엄마는 주먹 쥔 손으로 눈물을 쓱쓱 털어냈다. 떠나는 외삼촌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도 키웠는데, 네 자식 못 키우겠니. 누나가 잘 키울 테니 걱정 말고 가. 엄마 만나서 못 받았던 사랑 실컷 받고 편히 쉬어.”
외삼촌이 떠나고 엄마는 외삼촌과 함께 일했던 가게에 들어가지 못해 한참을 비워 두었다. 오랫동안 치킨을 먹을 수 없었고, 길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도 돌아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슬픔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지만, 슬퍼만 하기에는 엄마가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외삼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외삼촌의 세 자녀를 키워야 했으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법정 후견인이 되는 거였다. 애들의 친모를 찾아서 양육 포기 각서를 받고, 지원받을 수 있는 혜택을 알아보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책임져야 할 일은 이것 말고도 무수히 많았다.
엄마에게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데, 세 명이 더 생겨버렸다는 것에 우리 자매들은 한숨을 지었다. 사촌 동생들이 엄마를 힘들게 할 때마다 후견인을 포기하고 시설에 보내라는 사나운 말도 했었다. 눈에 보이는 엄마의 고생이 안타깝기만 했다. 엄마는 못된 말을 하는 우리를 야단치지 않았다. 힘들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저 아이들이 삐뚤어지지 않고 크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엄마는 우리 집과 외삼촌 집을 매일 같이 오가며 성인이 된 두 딸을 제외한 다섯 명의 아이를 키웠다. 엄마가 사촌 동생들과 한집에서 같이 산 건 아니었지만, 그 애들에게 고모는 엄마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후견인이 필요 없는 성인이 되었고,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우리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온다. 사춘기를 겪으며 여러 마찰도 있었지만, 사촌 동생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고모가 얼마나 자신들을 애달파하며 마음으로 키웠는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키웠던 엄마, 남편에게 맞으며 가정을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썼던 엄마, 남루한 살림 속에서 일곱 명의 자식을 키워 낸 우리 엄마. 나는 엄마만큼 치열하게 삶의 역경을 넘어온 사람을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나만큼은 엄마의 삶을 최우선으로 인정하며 존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