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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행복

by 수경

임신과 함께 정신과 상담이 종결되고, 병원에 다닌 적 없었던 사람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약 없이도 잘 자고 잘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며 극진히 몸을 살폈다. 내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내게 기본값으로 세팅되어 있던 우울과 불안이 긍정의 에너지로 뒤바뀌었다. 1년간 방황하고 아파하던 시간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30년이 걸린다고 했던 의사의 말은 의사로서 최악의 상황을 말하는 거고, 나를 겁주기 위한 말이었다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완전히 나았고 우리 셋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30년 동안 동고동락한 불안이 1년 만에 나를 떠날 리 만무했다. 내가 뭐라고, 전문가들이 연구한 치유에 필요하다는 시간을 30분의 1로 단축할 수 있겠나. 불안은 언제나 내 곁을 맴돌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틈을 살짝 보이면 기회다 싶어 달려들었다. 평범한 어느 저녁 시간, 밥을 먹다 식탁 앞에서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말했다.

“너무 감사하다. 너무 행복해. 우리 가족이 이렇게 웃으며 밥 먹는 거.”

아들은 피식 웃었다.

“엄마는 트리플 F야.”

일상이 평온한 아들은 평범함이 간절하고 귀했던 엄마의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한다. 언제 화낼지 모르는 아버지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밥 먹는 어린 엄마를 아이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아이가 영영 이해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이렇듯 작은 일상이 행복에 겨워 웃는 얼굴로 눈물을 콕콕 찍어 내다가도 불현듯 불안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불행이 오려고 행복한 건 아닐까. 불행은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될까.


집에 불이 나거나 강도가 들까 봐 무서웠다.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내가 죽거나 아이나 남편이 죽을까 봐 불안했다. 뉴스의 사건 사고가 모두 나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걱정들은 심신을 피로하게 했다.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가스 밸브를 확인하고, 한밤중 덜그럭거리는 이상한 소리만 들려도 집안의 잠금장치를 살폈다. 장거리 여행을 가면 운전하는 남편 옆에서 잔뜩 긴장하며 사이드미러와 백미러를 수시로 둘러봤다.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 안에서 이미 기진맥진했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할까 봐 걱정하고, 비행기 사고가 무서워 해외여행도 머뭇거린다.


예측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살았던 시간은 평온한 상태를 낯설고 어색하게 받아들였다. 언제 또 공포의 순간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으로 현재의 평온을 즐기지 못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다 작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하며 오히려 안도하는 모순적 감정을 느꼈다.


불안은 여전히 곁에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안이 일상생활을 흔들어 놓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불안, 너 왔구나. 말을 건다. 후, 숨 한 번 크게 쉬고 인식한다.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부푼 몸집을 조금이나마 수그러들게 한다. 나비포옹(심리 안정화 기법)을 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책장에서 그림책 한 권을 꺼내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다. 나에게 묻고 대답한다. 괜찮니? 응, 괜찮아.


아직 네가 두려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너와 함께 고민하고 내 기분도 말할 수 있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쩌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무서운 밤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괜찮니?” “응, 괜찮아!” -조미자, 《불안》


불안한 인생을 40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는 불안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불안도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 감사해한다는 것. 퇴근길 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하면 감사하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며 집에 들어올 때. 남편의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릴 때. 그리하여 우리 가족 모두 무사히 만났을 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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