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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ul 15. 2024

불안한 행복

 임신과 함께 정신과 상담이 종결되고, 병원에 다닌 적 없었던 사람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약 없이도 잘 자고 잘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며 내 몸을 극진히 살폈다.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갑자기 엄청난 긍정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1년간 방황하고 아파하던 시간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30년이 걸린다고 했던 의사의 말은 의사로서 최악의 상황을 말하는 거고, 나를 겁주기 위한 말이었다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완전히 나았고 우리 셋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30년 동안 동고동락한 불안이 1년 만에 나를 떠날 리 만무했다. 내가 뭐라고, 전문가들이 연구한 치유에 필요하다는 시간을 30분의 1로 단축할 수 있겠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안은 언제나 내 곁을 맴돌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틈을 살짝 보이면 기회다 싶어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공포에 노출되어 살다 보니 평온한 상태가 일정 시간 유지되면 낯설고 불안했다. 언제 또 공포의 순간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으로 현재의 평온을 즐기지 못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어린 시절 언제 화낼지 모르는 아버지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밥 먹던 때와 대조되는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고 감사해서. 그러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불행이 오려고 행복한 게 아닐까. 불행은 어떤 모습으로 올까. 행복이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내 손으로 평온의 상태를 깨버리곤 했다. 예측할 수 없을 때 불안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생겼지만 낯선 행복, 신뢰할 수 없는 행복 앞에서 예전처럼 내 몸에 상처를 내는 날이 있었다. 샤워하며 샤워기로 이마를 쾅쾅 내리쳤다. 이마가 욱신거리고 피멍이 번지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한 번씩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무 재질의 티테이블을 커터칼로 밤새 난도질했다. 테이블이 움푹 파이고, 커터칼이 죄다 부러져도 뭔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팔목 위를 긋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칼날이 아닌 칼등으로 그었다. 팔에 빨간 사선들이 생기고 나서야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은 내가 밤새 옷방에서 했던 광기 어린 행동의 흔적을 보았다. 형태를 잃어버린 티테이블, 부러진 칼날들을 보며 섬뜩했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내 팔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몸에 또 다른 상처가 있는지도 살폈다. 나는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 숙인 채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남편은 어디 나가지 않고 집에 무사히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내가 저질러 놓은 것들을 처리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이를 깨워 씻기고 밥을 먹여 유치원에 보냈다. 혼자 남은 조용한 집에 앉아 부어오른 팔을 내려다보자 지난밤의 일이 후회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돌아왔다. 당황해서 쳐다보자, “오늘은 너랑 데이트 좀 해야겠다.” 하며 웃었다. 

 조퇴하고 온 남편과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국물을 떠서 입 안에 넣자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말은 지키지 못할 걸 알고 있어서 하지 않았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했다. 내 핑계로 조퇴도 하고 오히려 좋다며 순댓국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미안해져서 울다 먹다, 울다 먹다를 반복했다. 나는 종종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사고를 쳤다. 불과 4년 전 일이다.    


 자해를 멈추고 불안이 현저히 줄어든 건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작정하여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일을 상세히 적고 내 감정을 검열 없이 쏟아냈다.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을 마구잡이로 꺼냈다. 감정에 취해 글을 쓰는 내내 울었다. 글 속의 어린 나를 바라보며 자기 연민에 빠졌었다. 낯 뜨거운 글이었지만 필요했던 과정이다. 뭉친 덩어리들을 반복하여 꺼내다 보니 더는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의 일들이 아프지 않았다. 선명했던 상처들에 새살이 올라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생긴 가장 큰 변화였다. 


 불안은 여전히 곁에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안이 일상생활을 흔들어 놓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불안, 너 왔구나. 후, 숨 한 번 크게 쉬고 인식한다.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조금이나마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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