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동고동락한 불안이 1년 만에 나를 떠날 리 만무했다. 내가 뭐라고, 전문가들이 연구한 치유에 필요하다는 시간을 30분의 1로 단축할 수 있겠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안은 언제나 내 곁을 맴돌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틈을 살짝 보이면 기회다 싶어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공포에 노출되어 살다 보니 평온한 상태가 일정 시간 유지되면 낯설고 불안했다. 언제 또 공포의 순간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으로 현재의 평온을 즐기지 못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어린 시절 언제 화낼지 모르는 아버지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밥 먹던 때와 대조되는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고 감사해서. 그러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불행이 오려고 행복한 게 아닐까. 불행은 어떤 모습으로 올까. 행복이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내 손으로 평온의 상태를 깨버리곤 했다. 예측할 수 없을 때 불안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생겼지만 낯선 행복, 신뢰할 수 없는 행복 앞에서 예전처럼 내 몸에 상처를 내는 날이 있었다. 샤워하며 샤워기로 이마를 쾅쾅 내리쳤다. 이마가 욱신거리고 피멍이 번지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한 번씩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무 재질의 티테이블을 커터칼로 밤새 난도질했다. 테이블이 움푹 파이고, 커터칼이 죄다 부러져도 뭔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팔목 위를 긋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칼날이 아닌 칼등으로 그었다. 팔에 빨간 사선들이 생기고 나서야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은 내가 밤새 옷방에서 했던 광기 어린 행동의 흔적을 보았다. 형태를 잃어버린 티테이블, 부러진 칼날들을 보며 섬뜩했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내 팔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몸에 또 다른 상처가 있는지도 살폈다. 나는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 숙인 채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남편은 어디 나가지 않고 집에 무사히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내가 저질러 놓은 것들을 처리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이를 깨워 씻기고 밥을 먹여 유치원에 보냈다. 혼자 남은 조용한 집에 앉아 부어오른 팔을 내려다보자 지난밤의 일이 후회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돌아왔다. 당황해서 쳐다보자, “오늘은 너랑 데이트 좀 해야겠다.” 하며 웃었다.
조퇴하고 온 남편과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국물을 떠서 입 안에 넣자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말은 지키지 못할 걸 알고 있어서 하지 않았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했다. 내 핑계로 조퇴도 하고 오히려 좋다며 순댓국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미안해져서 울다 먹다, 울다 먹다를 반복했다. 나는 종종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사고를 쳤다. 불과 4년 전 일이다.
자해를 멈추고 불안이 현저히 줄어든 건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작정하여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일을 상세히 적고 내 감정을 검열 없이 쏟아냈다.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을 마구잡이로 꺼냈다. 감정에 취해 글을 쓰는 내내 울었다. 글 속의 어린 나를 바라보며 자기 연민에 빠졌었다. 낯 뜨거운 글이었지만 필요했던 과정이다. 뭉친 덩어리들을 반복하여 꺼내다 보니 더는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의 일들이 아프지 않았다. 선명했던 상처들에 새살이 올라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생긴 가장 큰 변화였다.
불안은 여전히 곁에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안이 일상생활을 흔들어 놓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불안, 너 왔구나. 후, 숨 한 번 크게 쉬고 인식한다.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조금이나마 사그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