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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Mar 06. 2024

마지막 상담

2013년도는 내게 특별한 한 해였다. 10대 때 스킵한 사춘기가 뒤늦게 찾아와 서른춘기를 겪고 있었다. 그해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며 자주 혼잣말을 하셨다고 한다. ‘어릴 때 속 한번 안 썩이던 애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결혼 전의 나는 엄마밖에 몰랐다. 엄마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던 내가 갑자기 엄마만 보면 화를 내고 인상을 썼다. 남들은 결혼하고 엄마랑 더 친해진다는데 나는 반대였다. 그때 엄마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어디 그뿐인가. 평소 나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숙제하듯 하나씩 해치우며 남편 속도 썩였다. 가령 이런 것들. 담배 피우기(딱 두 번),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가기, 가출 등등.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으며 온갖 일탈 행동을 원 없이 하고 난 후, 나는 괜찮아졌다. 좋아지고 있었다. 잘 살고 싶은 의지가 생기면서 아기를 낳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임신을 염두에 두자, 정신과 약을 먹는 게 꺼려졌다. 의사와 상의 없이 내 마음대로 약을 중단하고 그로 인해 제때 출근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기기며 괴로워하던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 엄마 연배의 선배 교사는 내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며 조심스레 한방 정신과 진료를 권유하셨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생님께서 알려준 대학병원의 한방 정신과에 갔다.     

 

한방 정신과는 여러모로 양방과 달랐다. 기본적인 검사는 동일했지만, 진맥을 보고 침을 맞는 건 확연하게 다른 점이었다. 첫 진료 때는 양방에서 했던 검사를 다시 한번 해야 했다. 여러 종류의 검사지에 체크하다 1년 전 처음 정신과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우느라 제대로 검사받지도 못했던 내가 그날은 웃고 있었다.

     

선생님께 그간의 병원 진료와 나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며 약을 중단하고 싶다는 의사도 밝혔다. 수면제 없이 잘 수 있게 되면 아이를 갖고 싶다고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갑자기 약을 중단하는 건 어렵다며 인지행동치료와 함께 수면제 용량을 줄여가자고 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셨다. “양방에서 치료를 잘 받고 오셨네요.” 인자하게 웃던 선생님의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셨다.     


몇 주간 한방 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며, 수면제를 4분의 1로 쪼개 먹어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수면제를 중단해도 되겠다며 다른 약을 주셨다. 과립 형태의 한약으로 한방 수면제라고 했다. 한방에도 수면제가 있다는 게 신기했고, 왜 진즉 주시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며 열심히 챙겨 먹었다.

몇 주 후, 평소처럼 병원에 갔고 그날은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상담이 되었다.     


11월 첫 주였다. 선생님은 여느 때와 같이 상담 시작 전에 진맥부터 짚으셨다. 다른 날보다 여러 번, 오래 짚으셨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젠 병원에 그만 오셔도 돼요.”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단언에 어리둥절했다.      


“임신하신 것 같아요. 축하합니다.”    

 

이어진 말씀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도 잠시, 문득 수면제가 걱정되어 눈물 범벅된 얼굴로 물었다. 수면제를 먹었는데 아기는 어쩌냐고. 괜찮은 거냐고. 선생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실은 그 약, 수면제 아니었어요.  임신에 도움이 되는 약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 날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을 확인하고 한방 정신과에 갔다.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양손에 롤케이크와 음료 박스를 들고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값진 격려를 보내 주셨다.

    

“누구보다도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수경님에게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약입니다. 우리 다시 만나지 말아요.

잘 살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의 벅찬 가을 풍경을 보며 아기에게 속삭였다.    

 

“나에게 와 줘서 고마워. 엄마 진짜 잘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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