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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Feb 26. 2024

작은 용기의 근원

사랑

 정신과를 다니며 약에 기대어 산 지 1년 가까이 되었을 때,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약을 먹는 건 나인데 어느 순간 약이 나를 삼켜버리는 듯한 무서운 감정이 일었다. '작은 알약들이 내 삶을 쥐고 흔드는구나.' 두려우면서도 불쾌했다. 이젠 약 없이도 괜찮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용기 가득했던 어떤 날, 나는 2주 치의 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희망을 가득 품고 약 없이 하루를 보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웠고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문제는 밤이었다. 자려고 누웠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만 달려가는데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오늘만 지나면 내일은 지쳐 쓰러져 잠들 수 있을 거야.’ 희망을 놓지 않고 긴 새벽을 버텼다.          

 검푸른 밤에 어둠이 걷히고 불그스름해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누워 청명해지는 아침 풍경을 맥없이 바라보다 출근했다. 한숨도 못 잔 탓인지 종일 심한 두통으로 힘들었다. 퇴근한 남편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나를 걱정하며 약을 먹었는지 물었고, 나는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많이 좋아졌다는 걸. 이젠 약 없이도 잘 수 있고 평범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오지 않았다.           


 약을 거른 지 이틀째. 어둡고 고요한 방에 누워서 나도 남편처럼 잠들기를 바랐지만, 내 심장 소리만 점점 크게 들려왔다. 실망과 패배감,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약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인지하자 거대한 불안이 들이닥쳤다. 조용히 거실로 나와 쓰레기통을 뒤졌다. 전날 버렸던 약을 한 움큼 꺼내 먹고는 남편 옆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약에 취해 자느라 무단결근을 했고, 직장으로부터 연락받은 남편은 황급히 집으로 왔다. 자는 나를 흔들어 깨워 살아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나의 직장 상사에게 전화했다.     

 “죄송합니다. 수경이가 아파서 출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공에 대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통화하는 남편을 보자 무안하고 미안하고 속상했다. 억울함도 있었다. 다시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울면서 소리쳤다.     


  “이번은 아니야! 죽으려 했던 거 아니라고! 정말이야. 약 안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

     

 남편은 내 곁으로 다가와 이불을 내리고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태 자느라 배고팠겠다. 밥 먹으러 가자.”          


 퉁퉁 부운 얼굴로 남편과 전복죽을 먹으러 갔던 그날은 유독 선명히 기억된다. 머리는 어떤 모양이었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죽 가게의 어느 테이블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죽이 나오는 동안 거울을 보며 “나 너무 못생겼다.” 했더니, “너는 부어도 예뻐. 우는 모습은 더 예뻐. 그러니까 내 앞에서만 울어. 어디 가서 막 울고 그러지 마.” 했던 것까지. 그날의 모든 것들이 머리와 가슴에 또렷이 새겨졌다.     


  당시 남편은 회사에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나 때문에 조퇴를 비롯한 연차를 밥 먹듯이 썼다. 심지어 다음 해 연차까지 끌어와 쓰기도 했다. 평사원이었으니 상급자에게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까. 갑작스럽게 구멍을 메워야 하는 동료들에게는 또 얼마나 미안하고 민망했을까. 그럼에도 남편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쓸까 봐, “이참에 나도 쉬어서 좋아.”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의 배려 깊은 행동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의사와 상의도 없이 갑작스레 약을 중단한 건 무모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용기이기도 했다. 작은 용기의 근원은 사랑. 무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은 나약한 마음에 용기를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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