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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Aug 24. 2023

1988년 12월 24일

늦게 쓰는 일기

오늘은 재롱잔치 날이었다. 그동안 친구들과 열심히 준비한 율동을 부모님 앞에서 뽐내는 그런 날. 일곱 살은 아기가 아닌데, 재롱이라니. 처음 재롱잔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치하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한겨울의 축제’ 이런 멋진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 텐데.      


내가 맡은 재롱은 두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고운 한복을 입고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에 맞춰 율동하는 거였다. 남자 짝꿍과 짝을 지어 그 애는 갑돌이, 나는 갑순이가 되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율동 연습을 하느라 매일매일 노래를 들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랑은 아픈 거고, 슬픈 거고, 무서운 거니까.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결혼도 하지 않을 거야.


난 착한 아이라서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열심히 연습했다. 드디어 오늘, 엄마에게 나의 예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원래 토요일은 집에 있는 날인데 재롱잔치 때문에 특별히 아침부터 유치원에 모였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쎄쎄쎄를 하고 소꿉놀이를 하다가 내 차례가 되면 무대 위에 올라가 연습했다.


금세 점심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갔다. 점심을 먹고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오면 되었다.

저녁에 있을 재롱잔치가 기대되어 들뜬 마음으로 집을 향해 달려갔지만, 집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대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대문 밖으로 아빠의 고함치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집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모습일지 짐작되었다. 여섯 살 때, 다섯 살 때 그리고 엊그제도 보았던 그 장면일테지. 가슴은 쿵쾅쿵쾅, 온몸이 저릿저릿, 오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입에 넣었다. 또 손톱을 물어뜯는다며 엄마한테 혼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서울 때 손톱을 뜯으면 조금 괜찮아졌다. 손톱 깨문 입 안으로 눈물이 흘러 들어왔다. 밥 대신 짠 눈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엄마는 재롱잔치에 오지 못하겠구나.     


비어있는 배를 고 유치원으로 돌아갔다. 무대에 오를 복장으로 갈아입고 마지막 리허설을 마쳤다. 머리에 무스를 바른 남자애들과 얼굴에 엷은 화장을 한 여자애들은 부모님을 기다리며 줄을 맞춰 앉아 있었다.


창밖이 파랬다. 해님은 오늘 할 일을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나 보다. 나도 데리고 가지.    

 

친구들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유치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친구들은 엄마 아빠를 보며 헤죽헤죽 웃거나 손을 흔들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저기 있다고 자랑 같은 걸 했다. 여러 부모님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내 어깨는 점점 바닥에 내려앉았다. 분명 엄마가 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눈은 눈치도 없이 자꾸 문을 기웃거렸다.


나를 보러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내 몸짓을 누구에게 보여줘야 할까. 봐주는 사람 없이 무대에 올라도 되는 걸까. 엄마가 없다고 무대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바보가 되면 어쩌지. 울면 안 돼. 화장이 얼룩지잖아. 친구들한테 창피하잖아.


그때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퉁퉁 부은 얼굴, 재롱잔치에 오기 위해 했던 뽀글뽀글한 파마머리. 가여운 나의 엄마가 눈 안에 들어와 출렁거렸다. 참았던 마음이 터져서 울어 버리고 말았다.

기대하면 안 되는 마음, 아빠에게 얼마나 맞았을지 모를 안타까움, 중요한 날을 망쳐버린 아빠에 대한 미움이 한데 섞여 밖으로 흘러넘쳤다. 선생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고 얼굴에 향이 좋은 분가루를 톡톡 발라주셨다.


무대에 올랐다.

관객석에 있는 엄마가 보였다.

다른 부모들 틈에 어색하게 홀로 섞여 있는 엄마의 모습.

우리 엄마만 흑백 사진이었다.

흑백 사진 속의 엄마는 웃음도 생기도 잃은 채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았다.     


쳐다보지 말걸. 목구멍이 따가웠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뜨고 하던 걸 계속했다. 무대 위에서 울어버리면 나보다 엄마가 더 많이 울 것 같았다.      


재롱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얌전히 엄마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밤의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소리 내지 않고 말했다.      


엄마, 웃어 봐요.

저는 아직 웃는 걸 배우지 못했어요.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엄마가 웃으면 웃게 되고

엄마가 울면 울게 될 뿐이에요.

저는 꼭 엄마의 거울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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