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고 널따란 나뭇잎 위에 개미 열댓 마리가 올라앉아 있었다. 어두운 숲 속, 늪 가의 나뭇가지들과 수초가 가볍게 흔들렸다. 달팽이 한 마리가 병실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팽이는 나가고 싶어도 굳게 닫힌 쇠창살 때문에 나갈 수가 없어 한숨만 내쉬었다.
개미들이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자, 병실 창문에 드리워졌던 쇠창살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러자 달팽이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달팽이는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느려도 느리다고 비난하는 이가 없는 자유로운 풀숲이 그리웠다.
“힘내라, 힘! 힘내라, 힘!”
나뭇잎 위에 올라앉은 개미들이 달팽이에게 응원을 보냈다. 달팽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한 줄기 바람이 훅 끼쳤다. 달팽이가 허공을 올려다봤다. 검은 하늘에 떠 있던 초승달이 달팽이에게 말을 건넸다.
-행운을 빌어!
-고맙습니다!
달팽이는 개미들과 초승달에게 더듬이를 내밀고 꿈틀 인사를 했다.
푸른 안개가 밀려드는 깊은 밤. 병실 안은 침묵에 싸이고, 그곳을 감시하던 간호사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달팽이를 응원하던 개미 중 한 마리가 애가 타는 듯 방방 뛰며 말했다.
-좀 더 빨리, 좀 더 속도를 내 봐!
뒤에서 금방이라도 누군가 잡으러 올 것만 같아서 달팽이도 애가 탔다. 하지만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느리지만, 달팽이 딴에는 죽을힘을 다해 가고 있는 거였다. 간신히 건물 밖으로 내려온 달팽이는 나무들이 어둑하게 늘어서 있는 숲길을 향해 느릿느릿 기어갔다. 어디선가 바람이 몰아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일었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꿈이었다. 꿈속에서 탈출하던 달팽이 모습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달팽이는 과연 무사히 숲 속으로 돌아갔을까. 느려도 느리다고 비난하지 않는 숲으로 가서 행복을 찾았을까. 나도 하루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빗소리를 들으며 습관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병원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눈을 크게 뜨고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곱슬머리 형이 자살 시도를 했어.
나를 지켜보고 있던 민재가 말했다. 곱슬머리 형은 모두 잠든 새벽에 자살 시도를 하다가 간호사에게 발각되었다는 거였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목에 붙들어 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곱슬머리 형은 격리실에 감금되었다. 손발이 묶인 채 갇혀 있다고 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에게 격리실 주변을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가끔 그곳에서 간헐적인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갑자기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의 고동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 수군거리는 말소리들이 확성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아침 식사 시간에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한동안 들리던 곱슬머리 형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 형에게도 긴 잠으로 이어지는 주사를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나도 한때는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면 뭐 하나.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가장 편한 게 죽음으로 끝내는 길 같았다. 죽음의 유혹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할까? 옥상에서 뛰어내려? 아니면 면도칼로 손목을?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일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곱슬머리 형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평상시에 말이 없어 속마음을 알 수 없던 형이었다. 가끔 웃을 때도 있었고 같이 음악을 듣긴 했지만, 형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병동 안은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침마다 하던 재활교육 시간도 취소되었다. 병동 사람들은 저희끼리 모여 귓속말로 수군거렸다.
미술 시간엔 꿈에서 본 달팽이를 그렸다. 널따란 나뭇잎 위에 올라앉은 개미들, 어두운 숲 속 늪 가의 나무들과 수초. 조금 어둡지만, 환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병실 창문 틈으로 탈출하는 달팽이를 또렷하게 그리고, 푸른 안개가 밀려드는 깊은 밤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처리했다. 바람이 몰아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살아나도록 음영을 주었다.
-나도 자살 시도한 적 있었어.
산책 시간에 등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던 세아가 말했다.
-정신병원에 들어온 환자 중에 한때 자살 충동 느껴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내가 말했다.
-그건 그래, 나도 그랬으니까.
민재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겠지만 이곳에 들어온 환자들은 그 상처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병이 된 사람들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인지 산책을 하는 병동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우울한 마음과는 달리, 비가 걷히고 난 뒤의 하늘빛은 푸르고 선명했다. 나는 등나무 밑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탈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어떻게 나갈까.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둘기들이 날아와 의자 옆 쓰레기통에서 먹이들을 쪼아 먹었다.
곱슬머리 형은 다른 병동으로 옮겨간다고 했다. 앞으로는 곱슬머리 형에 대한 감시가 더 철저해진다는 거였다. 간호사와 보호사가 CCTV로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형을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형은 특별 관리로 취급되어 심리 상담도 받고 재활교육도 받아야 한다. 민재에게 전해 들은 얘기다. 형의 얼굴은 기력이 빠져서인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나는 형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형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형, 잘 가.”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형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형을 붙잡고 싶었다. 형이 치료를 잘 받고 밝은 얼굴로 퇴원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보고 싶을 거야, 형.
형과 같이 오랫동안 같은 방을 썼던 민재는 눈물을 글썽이며 형을 와락 껴안았다.
형도 민재를 끌어안았다. 곱슬머리 형은 몸속의 체액을 몽땅 빨아 먹힌 채, 빈 껍질만 밖으로 내던져지는 벌레처럼 비실비실 쇠창살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병동 사람들이 창가에 붙어 서서 건너편 건물로 들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