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강- 도입 문장 올리기 숙제
새벽 2시. 휴대폰 알람이 울리자 나는 잠에서 깨어 천천히 눈을 뜬다. 15분이 지나자 현관문을 열고 아내가 들어온다. 나는 휴대폰에 장착된 cctv로 아내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피곤한 듯 윗옷을 벗어 소파에 걸쳐놓고 앉아 눈을 감는다. 아내는 지금도 너무 예쁘다.
잠시후, 샤워를 마친 아내는 덜 마른 머리를 털며 다시 화면 앞에 나타난다. 와인 셀러를 열더니 와인병을 들고 소파로 온다. 나는 화면을 확대한다. 아내는 스크루로 블랙타워의 코르크 마개를 조심스럽게 뽑아낸다. 병을 기울여 붉은 와인을 천천히 따르고 와인의 향기를 음미한다. 아내는 와인을 마실 때만큼은, 무슨 의식을 치루는 듯 경건해 보인다. 블랙타워. 아내가 좋아하는 와인이다. 나도 이 술을 좋아한다. 아내는 잔을 들고 블랙타워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삼킨다. 잔을 든 채로 잠시 멈춰선 아내가 화면 밖을 바라본다. 나는 반사적으로 호흡을 죽인다. 혹시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아는 게 아닐까. 순간 나는 긴장한다. 그녀의 눈이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내는 조용히 남은 와인을 마시고,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아내와 나는 5년째 각방을 쓰고 있다.
아내를 처음 봤던 날, 순간 심장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아내의 눈빛에서 풍기던 진한 허무의 분위기는 나를 열망에 들떠 애타게 했다. 소믈리에인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말끔히 묶고 흰 와이셔츠에 검은 나비넥타이,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묶은 머리 사이로 드러난 목선, 와인 잔을 기울일 때의 입술. 그녀를 보고 있으면 술에 취한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와인바를 나와서도 내 머릿속엔 왠지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고 맴돌았다. 나는 아내를 보기 위해 와인 바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서 혼자 술을 마시곤 했다. 그녀의 표정은 황량한 들판을 떠도는 새처럼 허허로워 보였고 왠지 보호해줘야 할 것만 같은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아내는 내가 들어서면 웃으며 와인을 권했다. 바 뒤편에서 병을 집어 드는 그녀의 뒷모습. 하얀 셔츠 뒤로 드러난 등 라인. 그녀가 돌아설 때마다 나는 숨을 참았다. 그녀와 첫 데이트날, 아내의 머리는 풀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녀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봤다. 아내와 사귄지 1년 후 우리는 결혼했다.
퇴근 후에도 나는 항상 혼자다. 샤워를 마치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 남아있는 카버네 소비뇽을 잔에 반쯤 따른다. 식탁 유리 밑에 넣어둔 사진 속의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아내와 신혼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다. 괌 원주민들의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담겨있다는 절벽을 뒤로하고 아내와 나는 다정한 포즈로 어깨를 감싸고 있다. 훌륭한 와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맛과 향의 깊이가 더해지며 감미로운 향기까지 주게 된다. 반면에 곰팡이가 핀 통에 숙성시킨 와인은 썩은 냄새가 난다. 내 결혼생활도 오래전부터 서서히 곰팡이가 피어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서로의 내부에 끼기 시작한 곰팡이는 썩은 악취를 내며 나와 아내 사이를 갉아먹고 있는지도.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나에게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오직 와인을 즐기는 이 순간뿐. 나는 나도 모르게 점점 그 순간을 탐닉하게 된다. 연애기간 동안 나는 아내에게 다소 강박적인 집착을 보였다.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인데, 아내는 그것을 못견뎌했다. 아직도 여전히 예쁘고 매력적인 아내가 남자들의 시선 속에 둘러 싸여 있는게 불안하다. 결혼할 즈음, 아내가 와인 바에 나가는 것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일을 못하게 한다면 나와 결혼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버텼다. 나는 아내 이외의 여자엔 관심없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아내와 내가 이렇게 까지 사이가 멀어진 건 그놈의 경마때문이다.
퇴근 후면 나는 항상 혼자서 카버네 소비뇽 와인을 마셨다. 1년 7개월 전부터 아내가 추천해준 이 와인은 블랙타워에 비해 향이 더 깊고 풍미가 있었다. 어릴 때도 늘 혼자였는데, 지금도 난 늘 혼자다. 교실 창가 자리. 도시락 뚜껑을 열면 하얀 밥 위에 멸치볶음과 계란후라이 하나. 옆 친구 도시락엔 불고기와 햄, 나물 반찬이 가득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면 적막했다. 가출한 엄마는 연락을 끊었다. 옆집 할머니가 말해주었다. 엄마는 어떤 남자랑 바람나서 도망갔다고.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어도 상관없었다. 엄마를 잊은지는 오래니까. TV를 보다가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시계바늘이 밤 11시를 가리킬 때쯤 계단에서 아빠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몸에서는 짜장 냄새가 났다. 잠들어 있는 내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준 아빠는 아빠방으로 건너갔다.
카버네 소비뇽 한 잔을 마시고 저녁을 먹은 후, 소파에 몸을 던졌다. 텅 빈 거실.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린다. 아내는 5시에 출근했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껐다. SNS를 들어갔다 나왔다. 아내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새 게시물은 없었다. 위치 추적 앱을 켰다. 아내는 와인바에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광고 배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더비온, 합법 온라인 경마. 전에 회사 동료에게 들은 적 있었던 것 같다. 호기심에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앱을 다운받고, 회원가입을 했다. 본인인증, 계좌 연결. 생각보다 간단했다.
화면에 그날의 경주 일정이 떴다. 서울 8경주 - 1200m 혼합 2등급. 12마리의 말 이름과 사진, 기수, 최근 전적이 나열되어 있었다. 3번 영광의질주 - 최근 3경기 중 2승 1패. 단승 배당률 3.2배. 단승이 뭔지도 몰랐지만, 화면 하단에 친절한 설명이 있었다. 단승: 1등으로 들어올 말 한 마리를 맞추는 방식. 3번 말이 제일 성적이 좋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3번을 선택하고 1만원 '마권구매' 버튼을 눌렀다. 결제 완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경주가 시작됐다. 화면을 가득 채운 12마리 말이 출발선에 섰다. 실시간 중계 화면 옆으로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출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3번 영광의질주가 선두를 잡습니다! 뒤이어 11번, 7번이 추격!"
나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코너를 도는 순간, 7번이 바깥쪽에서 치고 올라왔다. 3번과 나란히 달렸다. 7번 거센바람이 3번을 따라잡습니다! 손에 땀이 났다. 마지막 직선 주로. 3번과 7번이 박빙이었다. 3번! 7번! 막판 스퍼트! 3번 영광의질주! 1등으로 결승선 통과! 화면에 큰 글씨가 떴다. 단승 적중. 배당 3.2배. 환급금 32,000원. 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1만원이 3만 2천원이 됐다. 환급 버튼을 눌렀다. 계좌로 입금됐다는 메시지가 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 같은 것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다음은 9경주가 30분 후에 시작된다고 했다. 나는 환급받은 돈 중 2만원을 다시 걸었다. 첫날은 5만원을 벌었다. 둘째 날은 3만원을 잃었다. 셋째 날은 10만원을 벌었다. 일주일 후, 나는 순수익 27만원을 만들었다. 그 후 나는 매일 저녁 경마 앱을 켰다. 퇴근하고나면 와인 한 잔 마시고 습관처럼 핸드폰을 켰다. 혼자 있어도 이제 외롭지 않았다. 날마다 그날의 경주 분석을 시작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최근 3경기 전적과 기수의 승률, 말의 컨디션 코멘트, 출발 게이트 위치까지 체크했다. 이제 단승은 재미없었다. 배당이 너무 낮아서 복승으로 옮겼다. 1등과 2등, 두 마리를 맞추는 방식이었다. 배당률이 20~40배 정도니 훨씬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