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오지마을을 추억하며

by 다섯시의남자

필리핀 오지마을을 추억하며.



마닐라에서 두 시간여를 달렸을 뿐인데 기가 막힌 오지가 나타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좁은 길로 몇 번인가 들어서는가 싶더니 급기야 강을 마주하고 길이 끊겼다. 강은 칠 흙 같은 밤이었지만 별빛을 품어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강폭이 30미터는 족히 될 듯했다. 수심은 얕았다. 깊은 곳도 발목 정도에서 찰랑일 정도였다. 바닥은 모래로 되어 있고 슬리퍼 사이로 밀려오는 감촉이 부드러운 진흙 같았다.


소달구지에 가져온 짐들을 옮겨 싣고 배낭만 멘 채 무리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강을 건넜다. 아래만 내려 보며 걷다 문득 강물에 별빛이 비치고 있음을 깨닫고 무심히 올려다보았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까만 하늘에 촘촘히 별들이 눈앞에 흩어져 있는 게 아닌가.

“아......” 하고 탄식 소리만 날 뿐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은 그대로 지금까지 사진처럼 가슴에 남아 있다.


오지마을이라고 하지만 아랫동네는 그래도 전기가 들어왔다. 화장실은 남자들도 가기가 두려운 곳이었지만 그럭저럭 사람 사는 동네 분위기였다. 꼬마들은 늦은 시간인데도 이방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나왔고, 어른들도 궁금해 하기는 아이들과 매 한 가지였다.


하룻밤을 어찌어찌 쪽잠을 자고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산으로 향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산 위에 있는 진짜 오지마을로 봉사활동을 갔었다. 오후는 너무 더워 학생들이 힘들어서 오전 중에 활동을 마치고 내려와야 했다. 두 시간 가까이 햇빛이 쨍한 민둥산을 올랐다.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과 마실 물을 실은 소가 따라오고 있었다.


산 위 마을에는 이십 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한집에 몇 명씩은 있는 듯했다. 거기다 아이 엄마는 어찌나 젊은지, 얼핏 아이들과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이들이 사는 집은 바닥을 1미터쯤 공중에 띄워 대나무로 만들었다. 아래 바닥에 돌 몇 개를 둘러 오래된 냄비가 하나 얹혀진 곳이 부엌이었다. 통풍이 잘 되긴 하겠지만 태풍이 오거나 하면 위험하기도 하겠다 싶었다.


가져간 학용품을 꺼냈다. 먼저 스케치북을 하나씩 나눠주고 그림 그리기를 했다. 색연필로 간단한 밑그림을 그려주면 색칠을 한다. 아이 엄마들의 눈빛을 도저히 외면하기 어려워 함께 앉아서 하게 했더니 아이들보다 더 좋아했다.

기다란 풍선을 불어 강아지도 만들고 칼도 만들고 꽃도 만들어 주었다. 한쪽에선 가져온 구급약품으로 상처 난 곳을 발라주고 간단한 기생충 약 같은 것을 나눠주었다.


세 시간을 아이들과 놀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간단한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었다. 그리고 학생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도중에 가져간 주먹밥을 나눠 먹었다. 덥고 지친 일정이었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가치관을 마주한 신비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사고로는 도저히 답을 내기 어려운 현장을 보고 내려왔다.

누구를 위한 봉사활동이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아랫동네로 돌아와 작은 구멍가게 두 군데를 다 뒤져 필리핀 브랜드 콜라를 한 박스 사서 학생들과 나누어 마셨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얼음을 가득 담은 컵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곳에 동화된 양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천 페소짜리 지폐를 바꿀 수 없어 함께 간 간사님들의 돈을 모아 계산을 마쳤다. 천 페소면 우리 돈 25,000원 정도가 되는데 여기서는 고액의 수표처럼 인식되었다.


늦은 간식을 먹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전날 밤에 그토록 부드러웠던 모래 바닥이, 현실은 소똥 천지였다는 것을 돌아오는 길에 알게 되었다. 얕은 물길을 따라 길처럼 난 곳으로 사람만 다녔던 것이 아니었다.

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눈길은 자꾸 위를 올려다본다. 산 위에 사는 아이들도, 아이 엄마들도, 별들도, 소똥도 금방 그리워질 것임을 짐작했다.


여행을 통해 학생들이 자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도 그들 못지않게 가슴이 뛴다.

코로나가 끝나고 어쩌면 다시 한번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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