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의 사계절
달력으로만 보자면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어야 하겠지만 이곳 대구는 아직도 한여름에 머물러 있다. 곧 비가 오고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온다고 하지만 그런 날이 설마 올까 싶은 요즘이다.
마닐라로 떠나는 짐을 챙기다 옷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마닐라도 학생들 여름방학은 끝났다. 많은 아이들은 여름 교복 위로 후드집업을 걸치고 등교하고 있다. 이미 한여름은 지났다는 얘기다.
마닐라에도 네 개의 계절이 있다.
hot hot hot hot 그리고 그 사이에 양념처럼 비 비 비 비.
적당히 견딜만한 여름과 찌는 듯한 무더위의 여름. 그리고 제법 선선한 여름과 비를 수시로 퍼 붙는 여름이다.
나 같은 장기 여행자라면 가끔 긴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폴로티를 입긴 하겠지만 대부분 반바지 두 장과 라운드 면 티 두어 장이면 된다. 사진만 보면 몇 월인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그에 비해 현지인들은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즉각 반응한다. 쇼핑몰에서는 제법 두꺼운 패딩이 팔리고 있고 냉방 버스를 타면 계산하는 안내원의 복장 또한 어김없이 패딩이다.
현지에서 몇 년 이상 살아온 교민들도 반바지만 입고 다니진 않는다고 한다. 그들처럼 그렇게 날씨에 적응된 것이다.
소나기도 그렇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볼 때마다 신기하다. 예고 없이 내리기 시작하고 갑자기 뚝 끊긴다. 잠시 비를 피해 불꽃놀이를 구경하듯 시원한 광경을 보다 쇼가 끝나면 가던 길을 무심히 가면 된다. 배수가 잘 안되는 동네에서는 간혹 집 앞에 강이 생기기도 한다. 길거리농구를 하던 곳에서 물놀이를 하게 된 샘이다.
현지인들은 불편함을 당연시한다. 지금껏 그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아직은 적응하기 힘든 일들을 수시로 만나게 될 것이다. 잠시 여행을 왔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다.
간단한 인테리어 공사를 하나 하더라도 세월이 걸리고 행정적인 절차는 언제나 내 편이 아니다. 운전할 때면 면허증 사이에 100페소짜리 지폐를 끼워 둬야 하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미묘한 실랑이 끝에 기막힌 타이밍을 잡아 잘 전달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앞으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다시 마닐라로 떠나는 짐을 정리하고 있다.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살려고 간다. 잘 살기 위해, 또한 검소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직은 여러모로 어리바리하겠지만 차츰 익숙해지고 신경 쓰지 않아도 물 흐르듯 잘 살아지는 날이 오겠지. 그러면 일상인 듯 여행인 듯 그곳에 더 깊숙이 스며들 것이다.
마닐라의 사계절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살다 보면 분별없이 hot 하기만 하지는 않겠지. 미세한 계절의 변화에 반응하고 그들과 같이 세월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게 되겠지.
아무리 익숙해지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반드시 돌아갈 날이 있다는 사실.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각성해야겠다.
#여행인_듯_일상인_듯
#그렇게_여행은_일상이_되었다
#낯선_거리_내게_말을_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