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떠나고 있습니다

by 다섯시의남자

지금 떠나고 있습니다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떠납니다.

10년 전인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꿈꾸던 여행이었습니다. 고대하던 세월만치나 떠나있어 보겠다 생각했습니다. 단 몇 달 만에 되돌릴 수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떠나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고 두려운 마음을 들키지 않게 누르고 당당한 미소로 그렇게 떠납니다.


마닐라의 알라방이란 동네에 십여 평 정도의 콘도를 얻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운 좋게 구한 것입니다. 바로 앞에 한국 슈퍼가 있고 도로에는 버스 정류장과 지푸니 타는 곳이 있습니다. 뒤로는 숲으로 둘러싸인 제법 멋진 빌리지가 있어 산책하기도 좋습니다.

서향이라 노을이 이쁩니다. 작은 베란다에 나가 해가 지는 것과 깨어 깊은 밤이 지나는 걸 오래 바라보는 일은 분명 멋질 것입니다.


이불이며 수건이며, 책이며 스탠드며 갖가지 물건들을 잔뜩 넣어 화물로 먼저 보냈습니다. 낯선 곳이지만 손에 익은 물건들이 얼마간은 익숙한 일상인 양 흔들리는 생각들을 안심시켜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면 시나브로 고향처럼 그리운 곳이 되겠지요.


왜 떠나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사실은 저도 가끔 묻곤 하는 질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대하던 여정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처음 순간을 잊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가 남겠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거친 샛길을 만나더라도 결국은 감사하겠지요. 분명 그럴 겁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아내의 결심이 놀라운 일입니다. 다들 아내가 동의했는지를 궁금해하더군요. 가만 생각해 보면 아내의 의견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당연히 같은 생각이라 여겨왔거든요. 아마도 아내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한껏 부풀려 늘어놓았을 겁니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으니 그 정도 누리는 건 당연하다고 얘기했겠지요.


원래는 동남아 5개 도시를 선정해 한 달 살이부터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내다 돌아와서 다음 도시를 준비하고 그렇게 하다 마음에 맞는 곳이 있다면 좀 더 오래 살아보려고요. 그러던 것이 어쩌다 마닐라로 바로 가게 되었고 1년짜리 숙소를 덜컥 계약해 버렸습니다.

하루 일과는 단순합니다. 우선 3개월은 동네 정찰을 할 계획입니다. 아침에 여유롭게 일어나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영어수업을 듣습니다. 오후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수영을 하겠지요. 요가나 헬스를 등록해 운동도 해야겠네요. 그렇게 동네가 익숙해지면 사람들이 어찌 살아가나 관찰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혹시 있을까 기웃거려볼 작정입니다. 돈 벌려고 나가는 건 아니지만 일을 통해 그 사회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계획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지만 역시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거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인생이 더 신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중에 한 가지 의지를 가지고 하려는 게 있습니다. 기록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서 기록을 통해 일상이 더 세밀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떠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씩 떠나는 과정을 점검하며 실행하고 있습니다. 키우던 화초를 누구에게 맡길까, 정기적으로 오는 우편물은 어찌해야 할까 같은 가볍게 여겼던 것들이 현실의 무게가 되어 한참 동안 생각을 잡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기대가 되기도 하고 왠지 슬픈 마음으로 차오르기도 합니다. 거기서 또 가지고 되돌아오지 못할 것들을 잔뜩 안고 살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잠시 여행하듯 당연히 불편할 것을 감수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떠나듯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래야겠지요.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고 나누고 섬기며 살다 돌아가는 것이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갈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면 인생이 좀 더 단순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추신 : 다들 어떻게 여행하는지, 어떻게 떠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합니다. 그리고 돌아갈 준비는 어찌하고 있을지도...‘여행인 듯 일상인 듯’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패키지여행을 하듯 급하게 둘러보던 것을 잠시 멈추고 예약한 기차를 놓쳐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허튼 상상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일상 속에서 꿈꾸던 여행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인_듯_일상인_듯

#낯선_거리_내게_말을_건다

#다섯_시의_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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