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이따이(Tagaytay)에서의 일상

by 다섯시의남자

따가이따이(Tagaytay)에서의 일상



여기는 따가이따이(Tagaytay)다. 마닐라에 사는 부자라면 이곳에 별장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마닐라에서 한 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오면 시원한 동네가 나온다. 물론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기오 같은 멋진 고산지대가 있긴 하지만 거긴 너무 멀어서 맘먹고 가야 하는 곳이고, 이곳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전망이 멋진 카페서 차 한잔하고 돌아올 수 있을 정도의 딱 좋은 거리에 있다.

따가이따이는 화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맑은 공기에 타알 화산과 호수의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여행으로 여러 번 와 본 곳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방학 동안 이곳으로 연수를 온 고등학생 18명의 생활지도를 부탁받았다. 나흘간 ‘따알 호수’가 시원히 보이는 곳에서 휴가 같은 날을 즐기고 있다. 이쪽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곳 담당 선생님이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내가 마닐라에서 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건지 내게까지 기회가 왔다.


이 멋진 풍경에도 학생들은 공부만 한다. 밥 먹고 공부하고 밥 먹고 자고, 쉬는 시간이면 가끔 콘도에 있는 수영장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대개 책을 읽는다. 이따금 멍하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사실 뭘 보는지 궁금하다. 여긴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와이파이뿐 아니라 데이터도 연결이 잘 안된다. 와이파이 대신 속만 터진다) 오기 전엔 책도 읽고 글쓰기도 하고 할 일이 많겠구나 싶었는데 뭘 하나 검색하려 해도(이럴 때 또 궁금한 게 많다) 인터넷이 안 되니 생각보다 시간은 더디 가고 상상력만 는다.

학생들 수업이 시작되면 주변 정찰을 할 계획이다. ‘피플즈 파크’나 ‘따알 호수’는 여러 번 가 봤지만 그 외에도 크게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이 절벽 능선을 따라 줄지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점심 먹고 잠시 나왔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피크닉 그로브’라는 공원이 있다. 요즘 같으면 슬렁슬렁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입장료가 75페소지만 숙소인 콘도에 무료입장권이 굴러다니고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들고나왔다. 공원 입구 앞에 북 카페가 있길래(이런 시골에서 북 카페를 만날 줄은 몰랐다) 일단 느긋하게 차 한잔하면서 인터넷도 좀 열어볼까 싶은 마음으로 들어왔다. 창밖으로는 열매처럼 보이는 걸 잔뜩 매달은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밑에서 트라이시클 몇 대가 나란히 주차해 있다. 기사들은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눈은 시종 행인들을 향한다. 공원 앞 택시정류장인 셈이다.

여기도 겨울이라 낮 기온이 25도를 넘지 않고 바람도 불어 꽤나 시원하면서도 선선하다. 오다 보니 군데군데 ‘사리사리’(필리핀 시골이나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조심스레 사진은 찍어 보지만 들어가기는 망설여진다. 한두 마디 따갈로그어(필리핀 언어)라도 배워두면 좋았을 걸 싶다.


걷다 보면 차로 휙 지날 때는 만날 수 없는 표정들을 만난다. 노점상 주인이나 동네 주민이나 학생들이나 아이들까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눌 수 있다. 내가 먼저 눈썹을 살짝 들면서(눈썹을 살짝 들면서 인사를 하는 게 호감을 표하는 인사법이라고 들었다) 웃을 때도 있지만 그들이 먼저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TV 여행 프로그램처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집까지 따라가서 저녁이라도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시골로 갈수록 사람들 표정이 선하다. 내가 살고 있는 마닐라 알라방도 좋지만 이곳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닭 울음소리도 명랑하다.


오후 시간이 되면서 사람들이 ‘피크닉 그로브’공원에서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 줄지어 도로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트라이시클을 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들 지푸니를 기다린다. 15페소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50페소나 내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외국인이나 젊은 연인들이 호기롭게 손을 들며 부르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단조로운 일상이다. 여행 중이라도 매일이 흥분되지는 않는다. 일상이라도 매일이 지겹지도 않다. 어디에 있든 어디를 여행하든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같은 곳이라도 풍경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저들은 ‘스스로 자기 방향을 알고 여행하는 걸까’ 하는 염려를 했다. 그러다 ‘나는 과연 방향을 알고 사는 건가?’하는 의심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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