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 사회에서 살아가는 법
혹은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행복해지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속물이란 어휘가 가진 부정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뜻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사전에는 속물을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럼 세속적이란 말은 어떤 뜻인가 봤더니 세상의 일반적인 풍속을 따르는 것이라 되어 있다.
그럼 일반적이란 건 뭔가 봤더니 이렇게 나온다. 일부에 한정되지 아니하고 전체에 걸치는 것.
결국 <속물>이라는 것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걸쳐진 풍속을 따르는 일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나는 속물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남들이 나를 향해 기대하는 것에 더 시간을 들인다. 철저히 속물 인간이다. 그래서 나쁜 인간은 아니지만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마법 같은 영화가 생각난다. 서울에서 힘들게 지내던 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귀촌 생활을 하며 힘을 얻어 새로 출발하게 된다는 영화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영화를 보면서 ‘내가 지쳤었구나’ 깨닫게 되는 영화였다.
천천히 호흡하고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는 법을 익힌다. 저녁 산책을 통해 발걸음과 생각을 조율하고 외부로 날을 세웠던 신경을 거두고 뿌리를 찾아 영양분을 공급하듯 급한 마음을 내려두고 오래 시간을 들여 자연의 섭리를 배운다. 이것은 마치 영화가 지친 나에게 내려 준 처방전 같은 것이다.
속물 사회나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행복해지려면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디를 바라볼 것인지 정해야 하고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한다. 변할 수 있는 용기, 외로움을 누릴 수 있는 용기.
내 주변에서 감격해 보자. 별일 아닌 듯 지나치지 말고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의외로 감격스러운 일들이 많다. 길고양이의 몸짓에서나 무화과나무의 새싹에서나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아기의 반가운 손짓에서 세상의 진짜 행복과 아름다움을 발견해 보자.
작고 소박한 것에 집중하고 살아보자. 너무 큰 꿈을 꾸지 말자. 경쟁이나 서열은 잊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살되 그 가치에만 집중하자.
오십이 넘었으니 이제 ‘일반적인 풍속’에서 벗어나 보는 것도 좋겠다.
더불어, 함께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