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 여자
남자처럼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심했던 시기는 고등학교 후반과 대학교 초반이었다. 고 2일 때의 내 바람은 군대에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키가 180cm에 달할 정도로 커져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랐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박스티에 힙합바지만 입고 다녔다. 주변 여성분들이 하나씩 말해 주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것이 티가 난다', '털털한 성격이 아닌데 털털한 척하는 것 같다' 등. 나를 걱정해서 해주는 말들이었다. 조언을 받아들여 옷차림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와중에도 행동만큼은 남자처럼 했다. 동아리에서 무거운 것을 마다하지 않고 들었고, 언제나 남자를 이기려고 했다. 등산을 할 때에도,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동기에게 뭘 가져오라고 시키는 여자 동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생물학적인 성별이 여자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다 받으면서, 남성으로서의 책임감까지도 짊어지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점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교적 성 역할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장점이 되기도 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에 일어났다. 나는 사회 속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처럼 행동했고, 육아를 할 때에는 불쑥불쑥 엄마처럼 행동했다. 무척이나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서 드러날 때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일거리 속에서 아이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게 버거우니까 익숙한 엄마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고, 그러고 나면 그런 내 모습이 싫어서 좌절하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분노는 시도 때도 없이 좁은 틈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정신없는 영아기를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주변 이웃들과의 교류가 힘들었다. 나는 웬만한 애엄마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내가 겪어 온 엄마보다 잘하는 애엄마들은 질투했고, 내가 겪어 온 엄마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애엄마들은 엄마에 대한 미움을 투사해서 싫어했다. 그런데 그 어떤 감정도 제대로 표출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나의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을까 봐 안에서 삭히려고 노력했고, 미처 삭히지 못한 감정이 아이에게 불똥을 튀기기도 했다. 나는 내 안에서 어떠한 동력도 꺼내지 못한 채 하루하루 무너져 갔다.
결국 나는 엄마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착하지 못해서 실체조차 잡히지 않는 엄마를 비롯하여, 결국은 서로 화해하지 못했던 양쪽의 부모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속에 잠재해 있는 분노와 미움을 떨쳐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