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 발로 심리상담센터를 찾아갔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아이에게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계속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조차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나인데, 마음을 치료해주는 선생님까지도 치료를 위해서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때에는 너무 서러워서 울분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어떤 날에는 상담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목놓은 울음이 꺼이꺼이 솟아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끝까지 버텨내었고, 지금은 상담을 종료한 상태다.
심리상담을 진행하면서, 선생님이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구토를 했던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어린 자신에게 가서 뭔가를 해주는 상상을 하라고 했다.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다음 상담 시간 전까지 상상을 했다. 어린 시절에 살던 집으로 간다. 거실 불이 꺼져 있어서 깜깜한 거실에서 불빛이 실낱같이 비춰 나오는 화장실 문을 본다. 손잡이를 돌려서 열면, 화장실 불이 쏟아져 나오면서 변기에 앉아 있는 어린 내가 바닥을 바라보며 몸을 깊이 우그리고 있다. 어른인 나는 어린 나를 일으켜 세워 바지를 올려주고,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어린 나는 고통스럽게 배를 움켜쥔 채로 몸을 웅숭그리며 어른인 나를 따라나선다. 밤하늘에 별이 떠 있고, 밤의 찬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데 싫지 않다. 상쾌함을 느끼며 함께 거리를 걷는다.
선생님은 나의 구토에 대해 거식증의 전 단계라고 말하였다. 아마 누구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거식증으로 발전했을 거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단발적인 증상으로 그쳤다고 말했다. 아... 어쨌든 밥을 먹고 크기는 했으니까 다행인 거겠지. 나는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새벽에 토하던 때에도 아무도 깨지 않도록 조심했었다.
상담 기간 중에, 엄마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꺼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변기에 앉아 있는 어린 나를 데리고 나가는 상상은 꽤나 유효했다. 딱히 어디로 가지 않았어도, 거리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성장하는 내내 몸서리치도록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끝내 도망치지 못했다. 장남이었기 때문이었다.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 장남이 있는가 하면, 동생들을 건사하면서 책임감에 짓눌리는 장남이 있다. 나는 굳이 꼽자면, 후자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는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완전히 떠나버렸던 언니와 달리, 나는 꼼짝없이 우리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고 서 있어야 했다. 어떤 시기에는 아버지조차 나에게 기대었는데, 그때 나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중반이었다.
나는 내 아이를 나처럼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 마음으로 상담 기간을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