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일기
저녁 시간, 첫째가 집 근처에 있는 헬스장으로 운동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길래 나도 강아지 산책이나 좀 시켜야지 하고 강아지를 개모차(개+유모차)에 태웠다. (이마트 에브리데이에 들르려면 유모차에 태워야 함)
"같이 가자~"
"나 준비할 게 남았어. 엄마 먼저 가."
중간쯤 왔을 때였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유모차 지붕을 내려주고는 서둘러 첫째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아직 출발 전이라고 했다.
"지금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이 없어. 나오는 길에 엄마 차에 잠깐 들러서 우산 좀 갖다 줄래? 너 가는 헬스장 건물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 나 그럴 시간 없는데"
그 대답을 듣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엄마 차는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마자 바로 앞 주차장에 있고, 지금 엄마는 네가 갈 헬스장 건물 1층에 있다고, 시간 얼마 안 걸린다고 말하려다가
"그래. 알았어."
하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유모차 때문에 달려갈 수도 없었고,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계단길로 갈 수도 없었다. 뛰어가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비를 온전히 다 맞으며 먼 길로 돌아가느라 15분이 걸렸다. 15분 동안 비를 맞으며 서운함이 북받쳐 올랐다. 친구가 중요한 나이인 건 알지만 엄마가 비를 다 맞고 올 거라는 생각을 못 할 정도인가. 나는 지금 아이의 마음에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까.
집에 들어오는 순간 최근 몇 달간 아이와 감정싸움을 하며 쌓였던 서운한 마음이 한꺼번에 터졌다.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한참을 울어서 이제 눈물이 그만 나올 만도 한데, 소리 내기를 그쳤는데도 어림없다는 듯 눈물은 계속 흘렀다. 기운 없이 누워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첫째에게 서운한 마음에 대해 카톡을 보냈다.
'친구가 아무리 중요해도 엄마를 너무 뒷전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해. 엄마 우산 갖다 주는데 1분만 양보하면 됐을 텐데.. 엄마가 너한테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 같아서 비 맞으면서 집에 오는 내내 너무 속상하더라... 사춘기라서 친구가 중요한 거 다 이해해. 근데 엄마도 좀 생각해 주면 안 될까...'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응.." 한마디였다. 그게 더 속상해서 또 눈물이 났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얼마 전 봤던 조벽 교수님의 영상이 생각났다.
<관계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 >
a. 상대방의 장점 50가지를 찾아 적어서 선물로 주는 것을 시도해 본다.
b. 상대방은 상처받아 겉으로는 기대하지 않거나 내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속으로는 모두 좋아한다.
c. 이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좋은 선순환으로 만드는 첫 출발점이 될 수 있다.
d. 하루아침에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매우 위력적인 방법이다.
비구어적으로라도 좋은 감정, 좋은 생각, 상대방의 좋은 장점 등을 끊임없이 떠올리면, 만나는 순간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좋은 감정이 교류되어 상처받은 관계가 힐링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아이의 장점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1.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잘 찾아낸다.
2. 엄마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얘기할 때 고칠 부분이 있으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3. 글씨를 예쁘게 잘 쓴다.
4. 머랭을 맛있게 잘 만든다.
5. 노래를 잘한다.
6. 친구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슬기롭게 해결하는 방법을 안다.
7. 예전에 자신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던 친구와도 다시 잘 지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8. 친구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학원을 옮기고 싶을 때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9. 명품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고 좀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10. 엄마가 주는 용돈 이외에도 옷이나 화장품을 엄마 돈으로 사준다고 하면 미안해할 줄 안다.
11. 친구 보는 안목이 좋다.
12. 술 담배 가출 등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13. 수행평가를 열심히 준비하려고 노력한다.
14. 제대로 마음먹으면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15. 매일 꾸준히 운동하려고 노력한다.
16. 피곤한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예: 아침 9시에 비닐류 분리수거하고 다시 자기)
17. 라면을 꼬들하게 잘 끓인다.
18. 한 번 하고자 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 (한 달 열심히 공부해서 제과제빵 필기 한 번에 통과)
19. 엄마가 집에 늦게 오면 걱정해 준다. (회식 때 12시 되어가면 어디냐고 전화함)
20. 엄마 카드를 가지고 과소비하지 않는다.
열심히 썼는데 20개에서 진전이 되질 않았다. (50개를 어떻게 쓰지...)
아이에게 그대로 보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딸이 요즘 너무 미워 보여서 일부러 장점 찾기 했어. 앞으로도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더 써볼게. 엄마는 아무리 네가 미워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랬더니 순화된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계속 엄마 힘들게 하는 건데..... 굳이 안 써도 돼..'
그렇게 우린 20분 동안 카톡을 이어갔다.
'좀 있으면 네 생일인데.. 너 태어날 때 그냥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욕심이 생겨서 엄마 스스로한테 화나는 걸 너한테 화낸 것 같아.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고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진짜로. 요즘 친구들이랑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그랬나 봐.'
'그래 행복하니까 다행이야.. 왕따 당하고 우울증 걸리는 애들도 많은데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서 엄마는 너무 고마워.'
'내가 행복한데 엄마는 힘들잖아. 그럼 내가 좀 더 노력해야지.. 엄마를 절대 신경 안 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속으로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중략)
그리고 마무리는 훈훈하게 사랑한다는 말로~
(으응은 딸램의 말버릇)
그리곤 잠이 안 와서 다시 조벽 교수님의 또 다른 영상을 보게 됐다.
<자녀와의 거래 금지>
a. 부모는 나중에 다 큰 자녀에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효도하기를 바라지만, 이는 슬픈 이야기이며 자식과 거래하는 것이다.
b. 가족끼리는 거래하지 말아야 한다.
c. 거래는 계산하는 것이고, 계산은 손익을 따지는 것이며, 손익을 따지기 시작하면 관계가 깨진다.
d. 가족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것이다.
e.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는 존재이므로,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헤아릴 수 없어 받은 만큼 되돌려 주지 못할 수 있다.
f. 그렇다고 배은망덕한 것은 아니며,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자신의 자녀에게 몰려주면 된다.
g. 사랑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순리이며, 부모가 자녀를 이해해야 자녀가 부모를 이해할 수 있다.
h. 순리대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콕 집어 해주시는 영상이었다.
아이는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부모가 사랑을 준만큼 되돌려 받으려고 하는 순간 관계가 깨진다. 아이에게만큼은 오롯이 주는 사랑으로 행복을 느껴야 할 것 같다.
다음날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부은 눈보다 더 불어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게 우린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