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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아 Oct 21. 2023

당신의 조용한 일상을 위해서

『수면 아래』 를 읽고


 집에서는 책 한 권은커녕 1/3만 읽어도 많이 읽었다고 할 정도로 집중이 잘 되지 않아 대개 책을 읽으러 갈 땐 카페를 선택한다. 카페에 가기 전에 그날의 날씨, 내 기분이나―예를 들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우울한지, 적적한지, 행복한지, 슬픈지, 무기력한 지―시간 등을 고려해 책을 고른다.

 어느 여름날, 습기가 잔잔하게 집안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SF소설이나 규모가 큰 소설은 보고 싶지 않았다. 딱 적당한 온도를 가진 미지근한 글이 보고 싶었는데 이주란의 『수면 아래』는 그날의 날씨와 기분 같은 것이 딱 들어맞았다. 잔잔한 소설이 주는 쓸쓸함과 따스함이 내가 받고 싶었던 위로였다. 누군가 내 옆에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 문장에 빠져 조용한 회복을 바라는 때가 있지 않은가.

 박연준 시인의 추천사처럼 『수면 아래』는 극적인 장면 없이 ‘나’(해인)와 장미, 유진, 환희, 우경, 엄마, 이모 등 등장인물의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로 우리 옆집이나 가까운 동네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따라간다. 복잡한 사정보다는 사정이 지난 후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해인과 우경의 관계보다 해인과 장미의 관계에 눈길이 더 많이 갔다.

 장미는 해인과 동창으로,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 채 자라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더욱 친하게 지낸다. 같이 떡볶이를 사 먹으러 가기도 하고 공통된 추억을 더듬거리며 찾아 얘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느 날, 해인이 장미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얘기*가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지금처럼 친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잡은 손이 차가워 그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꽉 잡아준 해인의 다정함과 도통 아버지의 손이 따뜻해지지 않아 무서웠을 장미의 두려움을 그려 본다. 어쩌면 스쳐 지나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순간을 장미는 또렷이 기억하고 그때 받았을 다정함을 지금의 해인에게 건네준다. 한 번의 만남이나 행동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친절과 따뜻함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다. 장미는 해인의 손을 기억하며 지금까지 살아왔고 장미의 숙면을 걱정하는 해인의 마음에 다시 한번 다정한 사랑이 얼마나 큰 감정인지 깨닫게 된다.

 소설 속 계절은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을 향해 달려간다. 이곳에서 해동중고 사장님과 장미, 유진, 환희, 그리고 환희의 친구들과 함께 칼바람을 피하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해인에게 겨울은 매섭고 춥기만 한 계절이 아닐 것이다. 평범하게 지나갈 법한 이야기의 포착은 춥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조용조용한 일상을 가지고 장편 소설을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다. 잔잔하고 조용하고 격동 없는 삶, 그럼에도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글. 이주란 작가의 글은 내 삶이기도 하고 친구의 하루, 얼굴 모르는 옆집 사람의 일상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장미의 숙면을 걱정하는 해인과 이제 못 볼 줄 알았다면서 다시 꼭 오라고 말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울고 있는 해인에게 휴지를 건네는 환희와 오래전 만남 이후 재회해 해인의 모습 하나하나 애정 어리게 바라보는 유진의 다정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는 것을. 어떤 아픔은 지워지지 못한 채 남는다. 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이곳에서 해인은 숙면을 취할 수 있으리라 확신이 든다.






  * 이주란, 『수면 아래』, (2023, 문학동네) 중 158p



글쓴이: 현아 (https://instagram.com/withst4nd)

편집자: 민지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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