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도시락 n계명
모종의 이유로 결심을 했건 간에, 다음은 러프하더라도 본인만의 원칙과 목표를 정해야 한다. 아직은 생소한 이 루틴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면 평소 본인이 좋아하는 식재료나 필요한 영양, 원하는 양 등 식사 자체에 필요한 요소는 물론이거니와, 선호하는 조리방법이나 일주일에 필요한 식사의 횟수, 하루 중 만들 수 있는 시간, 보관해야 하는 기간 등 만드는 과정에서의 기호나 환경도 고려되어야 한다.
다음은 내가 정한 항목들이다.
1 ) 전체 칼로리 : 400-500 kcal, 단백질 : 30g
2) 메뉴는 간단한 파스타와 샐러드에 한한다.
3) 주 재료(단백질원)는 최소 주 단위로 바꾸되 같은 식재료가 2주를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 나는 매 끼니가 '맛'있을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가볍게 먹을 점심식사에 있어서 굳이 맛이나 건강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에 비중을 둘 것이다. 사실 애초에 이 두 가지는 양립 불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소위 특정 종류의 맛을 폄하하는데 쓰이곤 하는 "건강한 맛"이라는 것도 매우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먼저 영양에 대한 목표치를 정하자. 평소 저녁식사 같은 경우 직접 해먹든 배달시켜먹든 평균적으로 많이 먹기도 하고, 또 같이 술을 곁들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점심을 살짝 부족하게 먹어 하루 섭취량을 맞춰준다. 그러면서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의 경우 조금 신경 써 보충한다. 메뉴에 한식은 제외되었다. 차려먹는 한 끼가 아니라 해결하는 한 끼에 가깝기에 반찬과 국 위주의 한식은 손이 많이 가고 손이 많이 가는 메뉴는 맛있기도 어려울뿐더러 의외로 질리기 쉽다. 노력은 결과와 비례하지 않는다. 또한 공용 공간에서 먹어야 해서 냄새가 많이 안 나야 하기도 하다. 반면 파스타나 샐러드의 경우, 만들기 용이하고 보관 기간이 유연하고 주 재료나 혹은 소스만 바꿔줘도 전체적인 맛의 변화를 줄 수 있다. 또한 풍기는 냄새도 비교적 덜하다. 모든 식재료는 개봉이나 해동과 동시에 최대한 빨리 소진해야 하기에 한 주 정도는 같은 재료와 같은 소스로 같은 메뉴를 만들어 먹는다. 그러나 물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주재료나 소스를 대략 1-2주마다 변경한다.
4) 비슷한 품질의 냉동 제품이 있다면 굳이 실온 제품을 고집하지 않는다.
5) 최대한 냄비에 삶는 조리법을 사용한다.
6) 하기 싫으면 언제든 멈추거나 그만둔다.
- 냉동 제품이 선호되지 않은 이유는 굳이 냉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신선도와 맛의 측면에서 냉장 재료들이 좋을 수 밖에 없고 조리 과정에서 해동할 수고가 덜어진다. 심지어 소량일 경우에는 가격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적다. 하지만 1인 가구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야채를 예로 들어볼까. 세 가지의 야채를 먹을 경우에 신선 제품의 경우 각각의 보관 기한, 한 번에 먹는 양들이 차이가 있어 한 가지씩 추가적으로 사야 한다. 또 항상 대량으로 사놓으면 다 먹어갈 즈음 질려버려 상하기 전 서둘러 억지로 먹거나 그마저도 그전에 상해 버리기 쉽다. 냉동식품에도 기한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 묵혀 둘 건 아니기에 굳이 억지로 처리하듯 먹을 필요는 없다. 자취생에게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되는 사치는 냉동 제품이 한해서 주어진다. 아 엄마가 보내준 올해 김장김치나. 냉동 야채 믹스의 경우 대개 적절한 비율로 여러 가지 채소가 섞여있기 때문에 한 번에 구매나 소비가 가능하고 사놓기만 하면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또 재료의 질에서도 미미한 여유가 생기는데 동값이면 냉장으로 국내산 정도라면 냉동으론 유기농 국내산이 가능한 식이다.
조리하는 방법으로는 삶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육고기나 어류의 경우 굽는 방식이 더 적합할 수 있지만 그 외 거의 모든 재료는 삶거나 데치는 방식이다. 삶는 방식의 좋은 점은 그것을 표준화하기 쉽다는 것이다. 재료를 물이 끓기 전부터 넣냐 끓고 있는 물에 넣냐만 정한다면 남은 변수는 시간밖에 없다. 따라서 요리 초급자들도 본인의 입맛에 맞는 삶을 시간을 알아낼 수 있다. 또한 그 적정 시간을 알아내기만 하면 타이머 설정 후 신경을 끄고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언제든지 그만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내가 그저 관성으로만 하고 있는 일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들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을 반복적으로만 하다 보면 그 행동 자체가 아직도 나에게 만족을 주는지에 대해 무감해지기 쉽다. 물론 꾸준함이나 습관이 가져오는 힘이 있겠으나, 고작 도시락 싸기에 무슨 대의가 있겠나.
2. 준비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차례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이제 본격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도시락을 싸기 시작한다면 가장 우선 필요한 것은 적절한 용기이다. 우선 다회용이어야 하고 전자레인지 사용 가능 용기일수록 좋다. 개인적인 선호도로 반투명한 흰색의 용기에 마찬가지로 반투명이지만 색이 있는 뚜껑의 가능한 도톰한 플라스틱 용기로 정했다. 그다음으로, 수저를 사자. 같은 플라스틱의 수저도 좋지만, 놋으로 된 조그마한 수저로 하기로 한다. 무겁고 변색이 쉬워 관리가 어렵다지만 아무래도 좋다. 도시락에 조그마한 불합리한 취향을 더해야겠다. 식재료에 대해서는 4. 에 기술하기로 한다.
3. 시행착오
처음에는 매 점심을 당일 출근 전 만드는 식이었다. 기상 후 간단히 샤워 전 파스타 면을 삶기 시작하거나 야채를 씻어 체에 받쳐 물을 빼기 시작하고 곁들일 육류의 경우 약불 프라이팬에 올려놓는다. 샤워 후 약불을 중불로 올려 육류 조리를 마무리하고, 그 팬에 익히던 파스타면을 넣고 야채나 소스를 더해 볶아 용기에 담는다. 샐러드라면 물기가 빠진 야채들을 담고 익힌 육류를 올리고 삶아놓은 계란을 얹고 소스를 뿌려 마무리한다.
이 방식의 장점이라면 아무래도 섭취 당일 만들기에 상할 염려가 적고 소스나 재료들이 여러 가지 준비되어 있다면(보통 한 가지밖에 없긴 하다.), 날에 따라 바꿔가며 먹을 수 있다. 혹시 어느 날 편의점 음식이 먹고 싶거나 아예 먹고 싶지 않다면 안 만들면 그만이다. 장점이 명확하면, 단점도 분명한 법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시간의 문제는 곧 컨디션의 문제가 된다. 도시락을 매일 싸는 것 자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이 아니더라도 기상시간을 넉넉히 30분 정도는 당겨야 한다. 여름의 하지가 지나 아침 오는 시간이 늦어지면서 기상하기가 아무래도 힘에 부쳤다. 또한 출근 시간에 하기에 번거롭고 오래 걸리는 과정은 어차피 주말에 미리 해놔야 하기 때문에 주말과 주중 모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에 주말에 모든 것을 끝내 놓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번의 검색 후, 밀프렙이라는 것이 있고 보통 주말에 주중에 먹을 도시락을 싸놓고 아침에 챙겨가기만 하는 방식이라 한다. 기존처럼 주말을 포함해 매 아침마다 만드는 것보다 주말 하루 정해 여러 식사를 만들어 놓는 방식이 시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절약이 가능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