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의 식탁 10 : 세상 가장 강력한 나를 일으키는 맛, 아는 맛
시드니의 미식은 화려하다.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 향긋한 바질 파스타, 달콤한 디저트까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이 허한 날이 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면 버터와 치즈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 그럴 때 내 몸은 본능적으로 외친다.
"밥. 하얀 쌀밥이 필요해."
찬장에서 전기밥솥을 꺼낸다. 쌀을 씻는 소리, "좌르륵, 촤르륵." 손끝에 닿는 쌀알의 감촉과 차가운 물의 온도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취사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30분. 칙칙폭폭 증기가 올라오며 구수한 밥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내 집 공기가 따뜻해진다.
밥이 되는 동안 팬을 꺼낸다. 오늘의 주인공은 호주산 소고기가 아니다. 파란 뚜껑의 노란 캔, 스팸(Spam)이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을 따고, 분홍빛 살코기를 도톰하게 썬다. 건강 따위는 잠시 잊기로 한다. 달궈진 팬에 스팸을 올린다. 기름을 두르지 않아도 자체의 지방이 녹아 나와 지글지글 튀겨지듯 구워진다. 겉면이 짙은 갈색이 되어 바삭해질 때까지 참아야 한다.
스팸을 굽고 남은 기름에 신김치를 볶는다. "치이익-" 시큼하고 매콤한 냄새가 온 집안을, 아니 복도를 타고 이웃집까지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상관 않겠다. 참기름 한 바퀴, 설탕 반 스푼을 더해 윤기 나게 볶아낸다. 마지막으로 계란 프라이 하나. 노른자는 터뜨리지 않고 반숙(Sunny-side up)으로. 가장자리는 갈색으로 바삭하게(Crispy edges).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위에, 반숙 계란과 바삭하게 구운 스팸 한 조각, 그리고 볶음김치를 얹는다.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짭조름한 스팸의 기름진 맛, 김치의 개운한 산미, 노른자의 고소함이 쌀밥의 단맛과 어우러져 폭발한다. 씹을 때마다 미간이 펴지고, 굳어있던 어깨가 내려간다.
바삭한 조미김에 밥을 싸 먹는 그 '파삭'하는 소리마저 위로가 된다. 아무리 멋진 브런치를 먹고살아도, 결국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이 소박한 한 끼다. 한국인은 밥심이라 했던가. 든든하게 채워진 배를 두드리며 생각한다. 이 맛을 아는 한,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더 버틸 수 있다고. 내일은 또 어떤 요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이 밥 한 공기면 충분하다.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맛의 디테일은 중요합니다. 지친 당신을 위한 가장 확실한 처방전입니다.
재료
쌀밥: 갓 지은 밥이 최고지만, 햇반도 환영.
스팸: 200g 작은 캔 하나 다 드세요. (리챔 안 됨, 꼭 짭짤한 오리지널이어야 함.)
신김치: 종이컵 1컵 분량.
계란: 1개.
조미김: 필수.
양념: 설탕 0.5큰술, 참기름 1큰술, 통깨.
맛있게 먹는 법 (The Ritual)
스팸 굽기: 스팸은 두껍게(1cm) 썰어야 식감이 좋습니다. 중 약불에서 인내심을 갖고 6면이 모두 노릇하고 바삭해질 때까지 굽습니다. (물컹하면 안 돼요!)
김치 볶기: 스팸 굽고 나온 기름에 김치를 넣습니다. 신맛을 잡기 위해 설탕을 꼭 넣으세요. 김치가 투명해질 때까지 볶다가 불 끄고 참기름을 두릅니다.
계란: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튀기듯이 굽습니다(Fried). 노른자는 살려주세요. 밥에 비벼야 하니까요.
합체: 따뜻한 밥 위에 스팸, 볶음김치, 계란을 올리고 깨를 뿌립니다.
마무리: 김에 싸서 드시거나, 다 먹어갈 때쯤 남은 재료를 다 넣고 비벼 드세요.
시드니의 식탁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식탁에도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기를, 그리고 가끔은 '나를 위한 밥'을 짓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Bon Appétit, 그리고 맛있게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