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검은 정장, 누가 우아함을 소비하는가
작품: 에드가 드가, <무대 위의 무희 (L'Étoile)>, 1878
우아함은 자연이 내린 축복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발명된 치장일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진실은 후자에 있다. 이 그림의 그것은 뼈와 근육을 깎아내는 물리적 고통과, 누군가의 욕망이 교환되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정교한 환상이다.
밤 11시, 조명이 꺼진 미술관에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며 화사한 파스텔 톤의 튀튀와 인공조명을 받아 빛나는 피부, 요정처럼 날아오르는 발레리나의 비상에 감탄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숭고한 궁정 예술에서 남성 관객의 시선을 겨냥한 공연으로 재편되며 등장한 저 짧은 튀튀의 매혹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화가 에드가 드가의 시선은 낭만이라는 얄팍한 껍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에 비친 발레리나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예술가가 아니라,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자신의 관절을 비틀며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한 명의 고단한 육체였다.
왜 드가는 유독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무대 중앙의 영광 대신, 그림자가 지는 무대 뒤편이나 땀 냄새가 진동하는 연습실 구석을 집요하게 드나들며 관찰했을까? 그곳에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로 돌아가는 진짜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화폭 속 무희들은 우아하게 미소 짓는 대신 부어오른 발목을 주무르고, 입을 벌려 하품을 하며, 기진맥진해 늘어져 있다. 당시 극장 구석을 몰려다니던 무희들은 대부분 파리 빈민가 세탁부의 딸들로, 이른바 파리의 쥐(Petits rats)라 불렸다.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 벼랑 끝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이들에게 발레는 살아남기 위한 사투였다. 드가는 날아오르는 단 1초의 환상을 위해, 이 작은 쥐들이 무대 뒤에서 치러야 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캔버스에 기록했다.
무대 한가운데 홀로 선 발레리나의 화려한 자태 뒤, 무대 장치 사이로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서 있는 그림 안의 검은 정장의 남자가 시선을 불편하게 한다. 그는 무대에 오르지 않지만, 이 무대를 굴러가게 하는 오페라 극장의 고액 후원자 아보네(Abonné)다. 당시 무대 뒤편에는 이들 아보네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무용수들의 대기실 포와예 드 라 당스(Foyer de la Danse)가 존재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희의 가족이 직접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남성들과 접촉해 딸의 생계와 거처를 의탁하는 것은 모두가 알면서도 침묵하던 서늘한 관행이었다. 드가는 이 불길한 검은 실루엣을 캔버스 구석에 교묘하게 배치함으로써, 시각적 권력의 우위를 시사한다. 조명을 받아 우아함을 만드는 이는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지만, 무대를 움직이는 저 어둠 속 남자는 그 우아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챙긴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춤을 향한 단순한 찬가가 아니다. 무대 위의 눈부신 우아함과 그 우아함을 지탱하는 무대 밖의 차가운 현실, 그 두 세계의 아슬아슬한 공존을 파스텔이라는 가장 부드러운 가림막으로 덮어 가려놓은 서늘한 풍경화다.
날아오를 듯 가벼운 저 무희의 발끝에 무거운 추가 달려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육체를 끌어당기는 물리적인 중력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시대의 무게일까.
Vibbidi Vobbi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