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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May 19. 2022

07. 엄마 없는 아이를 향한 다정한 위로

그림책 <문어 목욕탕>

언니!

언니의 편지를 읽으면서, 언니가 쓴 문장들 사이사이로 언니가 미처 말하지 못한 시간들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어. 언니가 '다름' 때문에 겪었을 여러 가지 일들과 그로 인한 상처가 괜찮아지기까지 상당히 많이 아팠을 테니까.

사실 내가 그랬거든. 나는 언니와는 또 다른 '다름' 때문에 어린 시절 내내 많이 위축되고 아팠는데 그 ‘다름’을 인정하고,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나의 ‘다름’은 집에 엄마가 없었다는 거야. 나는 부모님이 일찍 이혼을 해서 아빠 밑에서 자랐거든.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살던 기억이 몇 조각 남아있긴 했지만 엄마와 아빠가 헤어질 때 나는 너무 어려서 학교 갈 즈음에는 엄마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았어. 어렸을 땐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그렇게 위축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어.

학교에선 새 학기가 될 때마다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나누어주었는데 부모님의 '인적사항' 란에 엄마의 정보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렇게 창피할 일인가 싶은데 그때는 누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할까 봐 항상 전전긍긍했어.

어떤 선생님은 새 학기에 가정환경조사서를 제출하는 것과는 별개로 반 전체 아이들을 앉혀두고 거수로 환경조사를 했어. 모두 눈을 감게 하고 해당되는 사항에 손을 들게 하는 거야. 부모님이 이혼한 아이를 물어봤는지, 엄마가 없는 아이를 물어봤는지 그 질문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는 내내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어. 솔직하게 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손을 들 때 누가 눈을 뜨고 쳐다보면 어쩌지, 내가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다른 아이들이 알면 어쩌지. 선생님은 책장 넘기듯 무심하게 질문을 툭툭 던지는데 나는 긴장이 돼서 죽을 지경이었어. 나의 이 부끄러운 흠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긴장할 대로 긴장을 하다가 결국은 손을 살짝 들었다 재빨리 내리곤 했던 그때가 생각나.

생각해보니 지금은 이혼이라는 게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인데 90년대에만 해도 이혼은 쉬쉬하기 바빴던, 엄청난 일이었던 것 같아. 특히 이혼한 여자와 이혼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더 부정적인 시선이 갔던 것 같아. 이혼 가정은 곧 결손 가정이란 딱지가 붙곤 했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엄마가 있는 집이 부러웠던 그때를 생각하다가 이 그림책이 떠올랐어. 바로 최민지 작가의 <문어 목욕탕>이야.



엄마가 없는 아이가 혼자서 목욕탕을 가야 하는 상황에 주저주저 망설이다가 ‘문어 목욕탕’이라는 이름의 새로 생긴 목욕탕에 가는 이야기인데, 설정 하나하나가 얼마나 다정한지 몰라.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다란 문어가 앉아있는 카운터가 나오는데, 카운터 뒤로 목욕 요금이 이렇게 붙어있어. “어른 8,000원, 아이 800원, 혼자 온 아이 80원.”

언니는 알까? 혼자 목욕탕 가는 기분? 커서야 혼자 목욕탕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는 혼자서 목욕탕에 가려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거든. 특히나 아이들은 모두 엄마든 할머니든 누군가와 같이 오잖아. 목욕탕에 갈 때마다 혼자 왔다는 사실에 창피하고, 위축되고, 눈치 보이고, 외롭고, 서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 그림책의 요금표를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다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어.  

그뿐이 아니야. 혼자라서 위축되고 사람들 눈이 신경이 쓰였던 그림책 속 아이는 얼른 시커먼 먹물탕에 몸을 숨기는데 바로 거기에 문어가 나타난 거야. 문어는 아이를 물속 깊이 데리고 가서 신나게 놀아주고 문어발의 빨판으로 아이 몸 구석구석의 때를 시원하게 밀어줘. 여러 개의 문어 다리로 동시에 머리도 감겨주고 비누칠도 해주지. 문어가 아이를 씻겨주는 그림을 보다 보면 왜 이 목욕탕이 문어 목욕탕이어야 했는지 무릎을 탁 치게 된다니까. 몸을 숨길 수 있는 시커먼 먹물탕도 그렇고 말이야.

어렸을 때 목욕탕에 가면 혼자 앉아있는 게 싫어서 미지근한 온도의 탕에 들어가서 하염없이 놀곤 했어. 내가 다니던 목욕탕에 있던 그 탕은 마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것 마냥 물의 온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경사로가 미끄럼틀처럼 만들어져 있어서 아이들이 놀기 딱 좋았거든. 그 탕에는 어른들은 없고 항상 아이들로만 북적였어. 그래서 거기에서 놀 때는 내가 엄마 없이 온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경사로를 따라 내려갔다 올라갔다, 수영을 했다가 잠수를 했다가, 거기서 만난 아이들과 그렇게 놀다 보면 한 명, 한 명씩 엄마들의 부름에 때를 밀러 나갔어. 나는 혼자 남아 한참을 더 놀다가 마지못해 밖으로 나와 몸을 씻기 시작했고.


근데 그렇게 목욕을 하다 보면 꼭 ‘이리 와봐라’하며 나를 불러선 내 등을 밀어주는 아줌마들이 있었어. 어떤 아줌마는 본인 등도 같이 밀어달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아줌마는 내 온몸의 때를 밀어 주기도 했어. 나는 어쩔 줄 몰라 몸을 웅크리고 뒤돌아 앉아 그 아줌마들 손에 내 몸을 맡겼는데,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정한 아줌마들이야. 혼자 온 아이를 모른 척하지 않고 그렇게 챙겨주다니. 그림책 속 문어를 보는데 딱 그때 그 아줌마들이 떠올라서, 어쩌면 이 그림책 작가도 어렸을 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문어와 함께 신나게 놀고 개운하게 목욕까지 마친 아이는 기분 좋은 얼굴로 당당하게 목욕탕에서 나와. 그리고 그 뒤로 혼자서 목욕탕에 들어가는 또 다른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그 모습에 미소가 빙그레 지어졌어. 저 아이도 문어와 신나게 목욕을 하고 나오겠구나, 싶어서.

언니 편지를 받고 떠오른 이 그림책을 다시 한번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정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그 다정함은 단지 사람들의 태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작게는 지하철역에 붙어있는 포스터의 작은 문구나 동네 가게의 입간판, 크게는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까지도 묻어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문어 목욕탕’의 목욕 비용처럼 말이야.

차이와 다름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인식을 ‘다정함’이라는 말랑한 말로 지워버리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다정함’은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


조금만 더 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중학생이 되던 때부터 엄마와 다시 같이 살게 되었거든.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엄마가 있는 집’에 살게 된 거야. 그런데 그때 엄마 옆에는 재혼한 아빠가 있었고, 당연히 새아빠는 나와 성이 달랐어. 그때부터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나와 성이 다른 아빠와 동생의 존재였지. 사춘기 때라 나는 더 많이 밖으로 겉돌고 엄마와의 갈등은 극에 달했는데, 그때 나를 붙잡아주었던 건 내 옆을 지켜주던 다정한 친구들이었어. 내가 힘들어하면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랑 시간을 보내주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절대 안 먹겠다고 버티는 나를 위해 도시락을 나눠주던 친구들 말이야.




있잖아 언니, 나는 준호와 리아가 언니와 같은 엄마를 만나서, 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다름’을 대면하고, 그로 인한 타인의 시선과 차별을 이겨낼 거라고 믿어. 하지만 분명히 그것이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다름’을 감추고 싶을 때도 있을 거고, 힘들 때도 있을 것 같아. 그럴 때 주노와 리아 옆에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다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봐. 그 사람들이 최민지 작가나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처럼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으면 정말 최고겠다! 다정함과 약간의 유머는 정말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강력한 힘인 것 같아. 내가 <문어 목욕탕>을 보며 위로받은 것처럼 말이야.


그나저나 그동안 우주에게 ‘다름’에 대해 설명하면서 항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언니가 소개해준 책 너무 좋다. 우주랑 꼭 같이 봐야겠어. 나와 우주가 더 많은 ‘우아’를 발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게 말이야.

그럼 언니,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우리 또 다음 편지에서 만나.



2022.3.17

다정다감한 봄기운을 언니에게 불어 보내며,

다경





저자 : 최민지

노란상상|2018년



#목욕탕 #한부모가정 #목욕 #다름 #차이 #위로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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