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경 Jun 02. 2022

09. 아이 마음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 진정한 위로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 <화나면 늑대>

언니,


내가 언니 편지를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 언니 편지를 받으면 종일 설렐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어.

언니는 내가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언니의 이야기로 풍성하게 채워주고, 언니가 소개해주는 그림책들을 당장 서점으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찾아보고 싶게 만들어. 언니의 편지를 읽다 보면 언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생각나서 빨리 컴퓨터 앞에 앉고 싶어 안달이 나고. 근데 또 컴퓨터 앞에 앉으면 고민이 깊어져. 아, 무슨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지, 하고. 그러니까 언니의 편지는 내 머리와 팔, 다리를 계속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드는 거야.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언니 편지를 읽으면서 나 역시 항상 ‘해결사’가 되려고 하는 내 모습을 떠올렸어. 심지어 나는 아이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래. 친한 친구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면 나는 지금 문제의 핵심이 뭔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느라 친구의 마음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아. 전화를 끊고 나면 그제야 친구가 원하던 건 이런 말이 아니었겠구나 싶어 뒤늦은 후회를 하지. 그런데도 누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주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나야. 정작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는 ‘그냥 공감을 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야.


그나마 ‘해결사’로서의 장점이 있다면 일을 할 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책임을 따지는 대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한다는 거야. 문제가 생기면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거나 화를 내는 사람도 있잖아. 그런데 나는 비교적 차분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포기해야 할 것,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대안을 빠르게 생각해내는 편이야. 나는 그동안 그게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왔어.

그런데 언니가 말한 것처럼 그런 ‘해결사’ 면모는 육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게 오히려 엄청난 걸림돌이라는 것을 아이를 키우면서 뼈저리게 느꼈어. 특히 우주는,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 아주 강해서 그런지 내가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해도 절대 듣지 않거든. 아이 대신 뭔가를 해주는 것도,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 그런데도 아이 앞에서 자꾸 ‘해결사’가 되려고 하는 나를 돌아보게 해 준 그림책이 있어서 언니에게도 소개할게. 워낙 상도 많이 받고 유명한 책이라서 어쩌면 언니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바로 <가만히 들어주었어>라는 그림책인데, 제목만 봐도 어떤 책인지 느낌이 딱 오지?


                                                                                          어느 , 테일러는 뭔가를 만들기로 했어.

                                                                                                                         뭔가 새로운 거,

                                                                                                                         뭔가 특별한 거,

                                                                                                                       뭔가 놀~라운 거.

                                                                                                             테일러는 정말 뿌듯했지.


테일러는 어느 날 뭔가 새로운 거, 뭔가 특별한 거를 만들기로 해. 그리고 정말 놀라운 걸 만들어내지. 그런데 느닷없이 새들이 날아와서 모든 게 무너지고 말아. 깊이 상심해 있는 테일러에게 동물 친구들이 하나 둘 다가와서 테일러에게 말을 걸어. 그리고 각자 자기들만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닭은 호들갑을 떨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라고 하고 곰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라고 말해. 코끼리는 자기가 고쳐주겠다며 어떤 모양이었는지 떠올려보라고 말하고 뱀은 다른 친구들 것도 망가뜨리자고 말하지. 하지만 테일러는 그 어느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테일러의 계속되는 거절에 친구들은 모두 가버리고 테일러는 결국 혼자 남게 돼. 그때 토끼가 가만히 다가오는 거야. 체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테일러 곁에 머물러.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테일러는 토끼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해. 토끼는 테일러가 소리를 지르고, 기억해 내고, 웃고, 숨고, 복수할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서 그저 가만히 들어줘.

그리고 바로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때가 되자’ 테일러가 토끼에게 말하는 거야. “나, 다시 만들어볼까?” 하고. 토끼는 고개를 끄덕여주지.


때가 되자, 때가 되자, 때가 되자.

언니, 나는 이 책을 보는 데 있잖아, 이 단순한 말이 진짜 반짝반짝 빛나면서 책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어. 무슨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야.


전에 한 번 우주가 자석 블록으로 정말 공들여서 만든 탐험선이 무너진 적이 있었거든. 보통 나무 블록이나 자석 블록으로 뭔가를 만들다가 무너지면 그냥 다시 하면 되지, 하면서 고치는데 그날은 유난히 화를 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거야. 자기가 얼마나 아끼던 건데, 하면서 화를 내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다급하게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주려고 블록을 붙이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 전과 다르다면서 더 울면서 소리를 지르더라고. 괜찮다고, 다시 만들면 된다고, 더 멋지게 만들자고 말을 하면 할수록 우주는 더 화를 냈어.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아이한테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속상한 마음을 추스를 시간, 화난 마음을 표출할 시간.

사실 슬프고 속상할 때는 그냥 그 감정에 조금 더 머물러 있어도 되는 거잖아. 정작 나는 우울할 때 더 우울해지고 싶어서 슬픈 노래만 일부러 찾아 듣기도 하면서 아이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봐. 충분히 슬퍼하고, 절망하고, 괴로워해야 그다음으로 갈 수 있는 건데, 마음에 가득 찬 슬픔을 비우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데.

나는 테일러를 위로해주려고 다가온 동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가 힘든 상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해결책을 제시하기 바빴던 것 같아. 옆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걸 보기 힘드니까. 아이가 우는 모습을 오래 볼 수가 없으니까. 울지 말라고, 이렇게 하면 된다고, 별 거 아니라고, 내가 좋은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그냥 내 방식대로 밀어붙이기 바빴던 거지. 아이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에게 맞는 방법은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야.


내가 그동안 해왔던 건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는 걸, 정말 힘이 되는 위로는 그저 묵묵히 곁에서 체온을 나눠주고, 무엇이든 말을 하고 싶어 졌을 때 그때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이 책을 보면서 다시 깨달았어. 그렇게 가만히 들어주고 곁을 지켜주면, ‘때가 되어’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다는 걸 말이야.


그림책을 보다 보면 ‘아!’하고 머리 위에 전구가 반짝 켜지게 만드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랬어. 성별과 연령을 다 떠나 진정한 위로와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이 마치 한 권의 육아서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이 책은 꽤 오랫동안 우리 집 전면 책장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이 책이랑 비슷하게 육아의 지혜를 전해준 책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책도 함께 소개할게. 바로 <화나면 늑대>라는 그림책인데, 이건 ‘도레미 곰’이라는 전집에 포함되어 있는 책이라서 별도로 구하기 쉽지 않을지도 몰라.


내용은 아주 단순해. 엄마가 부엌에서 간식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화가 잔뜩 난 늑대가 들어오는 거야. 엄마는 늑대를 보고 깜짝 놀라지만 늑대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차분하게 인사를 해. 엄마는 늑대에게 무서운 사냥꾼을 만난 건지, 뭘 잃어버렸는지 다정하게 물어봐. 그래도 늑대는 여전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지. 하지만 엄마는 그런 늑대를 계속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는데, 그럴수록 사나운 늑대의 모습이 점점 여자아이로 바뀌는 거야. 털로 뒤덮였던 다리가 빨간 타이즈로 변하고, 뾰족하게 솟아있던 귀는 어느덧 얌전하게 접히고 머리 위에는 빨간 리본이 생겨.

가끔 아이가 알 수 없는 이유로(아마 아이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분노가 폭발할 때가 있잖아. 그때마다 나는 당황해서 이유를 묻고 아이를 달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서 해결방법을 제시하다가 결국 마지막엔 같이 화를 내기 일쑤였거든. 근데 이 책을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화가 난 이유는 당장 중요한 게 아닐 수 있겠구나, 나도 그럴 때가 있는 것처럼 아이 역시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 수도 있겠구나,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변함없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뿐이구나, 하는 것.

근데 언니 정말 놀랍게도 그게 통하더라. 우주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사소한 이유로 또 분노가 폭발한 날이었는데, 그런 아이를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냥 두 팔을 벌렸어. “이리 와, 우주야.”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어서 애가 나에게 설마 올까 싶었는데, 자기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었던 건지, 나의 품에 와서 폭 안기더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우는 우주를 안고 등을 다독여줬는데 어느새 아이가 진정이 되는 거야.

별 것도 아닌 걸로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느니, 차분하게 말하라느니 따위의 말로는 절대 가라앉지 않았던 아이의 분노가 그냥 안아주는 것 하나로 사그라드는 걸 보면서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 아이를 가르치는 건 말이 아니라 포용이구나, 하는 것.


왜, 육아 전문가들이 그러잖아. 먼저 아이의 감정을 인정해주라고. 그래서 그동안 항상 ‘우주가 화가 났구나. 우주가 속상하구나.’ 이런 말을 먼저 했었는데 아무리 해도 잘 통하지 않았거든. 아마 머리로 생각하고 억지로 짜내서 한 말이라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어. 말보다 체온으로 전해지는 포용이 힘이 더 세더라고. 포용은 역시 포옹으로 해야 하는 건가!

물론 아이의 알 수 없는 분노에 차분하게 대응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력의 방향과 방법을 안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언니는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내가 너무 길게 늘어놓은 것 같아서 왠지 부끄럽다.




근데 언니, 준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말 당황했겠다. 언니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오고, 기다려왔던 순간일지, 그 순간이 언니한테 얼마나 중요했을지 다 안다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알 것 같거든. 근데 언니, 아마 준호는 언니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아. 그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거 말이야. 물론 그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분명히 준호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해결해 나갈 거라고 믿어. 앞으로 언니와 준호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며 그 과정을 함께 잘 헤쳐 나가길 나도 응원할게.


그럼 나는 이제 시처럼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도서관으로 달려가야겠어. <다니엘이 시를 만난 날>이 다행히도 도서관에 있더라고.

언니가 소개해준 다정함 가득한 그림책을 볼 생각에 벌써 설렘이 한가득이야.

그럼 언니도 좋은 하루 보내!



2022.4.7

오늘도 설렘을 가득 안고,

다경



저자 : 코리 도어펠드

역자 : 신혜은


원제 : The Rabbit Listened

북뱅크|2019년


#위로 #공감 #경청 #가만히들어주었어



글 : 루이종 니엘만

그림 : 나탈리 자네르

역자 : 이성엽


그레이트 북스|도레미곰 중


#위로#공감#경청#포용#인정

매거진의 이전글 08. 다정함의 모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