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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Jun 16. 2022

11. 아이의 '화'를 바라보는 조금 다른 시선

그림책 <화가 나서 그랬어!>

언니! 


언니 편지를 받고 나도 모르게 하아,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어. 아마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다 그럴 것 같아. ‘감정’이라는 어마어마한 벽에 다들 한 번씩은 부딪혀 봤을 테니까 말이야. 


우주는 준호처럼 감정에 있어서 아주 섬세하거나 예민하지는 않아서 평소엔 ‘감정’에 대해 그렇게 고민할 일이 없었어. 그런데 두 돌 즈음이었나, 처음으로 ‘분노 발작’을 터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땐 정말 병원에 가야 하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어. 모래 놀이를 하고 돌아와 더러워진 손을 씻기 싫다고 하는 아이 손을 붙잡고 손을 씻겼는데, 과장이 아니라 정말 한 시간 가까이 소리를 지르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면서 온몸을 바닥에 부딪히는데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의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는 거야. 말 그대로 ‘발작’이라는 표현 말고는 다른 말을 찾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어. 

‘분노 발작’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아이가 한 번씩 화를 토해내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라 그때부터 나는 ‘감정’에 대한 그림책과 육아서, 육아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어. 그런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어떤 육아 프로그램에 우주와 비슷한 강도의 ‘분노 발작’을 보이는 또래 아이가 등장을 했는데, 거기 출연한 전문가가 그 부분에 대해 아주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라고 하는 거야. 정도가 너무 심할 때는 무슨 상담이나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많았는데, ‘정상 발달 과정’이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몰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난데없이 터지는 우주의 ‘분노 발작’과 화를 내는 상황이 편안해진 건 아니야. 감정을 다루는 책을 함께 보고, 화가 날 때 화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이야기해주고, 모든 게 원하는 대로 될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주었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어. 그런데 아이의 ‘화’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그림책이 있었어. 바로 <화가 나서 그랬어!>라는 그림책이야.


<화가 나서 그랬어!>는 여기 부루퉁한 얼굴로 길바닥에 누워있는 이 아이, 벨라의 이야기야. 책의 화자가 바로 벨라인데, 벨라의 목소리로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줘. 

아이랑 있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 때가 있잖아. 집에 들어와서 평상시처럼 전등을 켰는데 그걸 이유로 뒤집어진다거나, 늘 했던 것처럼 아이의 약을 약병에 넣고 흔들어 섞는데 그걸 섞었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약을 안 먹겠다거나. 

이 그림책 속의 벨라도 그래. 지난주에는 먹었던 달걀을 못 먹겠다고 울고, 신발이 신기 싫어서 던져 버려. 그저 과자가 부러졌단 이유로 화를 내고, 친구에게 짜증을 내며 나쁜 말을 해.

나는 화가 난 벨라의 목소리를 도드라지게 굵은 글씨로 표현한 게 참 탁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화가 난 상황 뒤에 숨겨진 아이들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이 글씨처럼 크고 난데없는, 아이들의 버럭 화내는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벨라처럼 무턱대고 화를 내는 우주를 보면서 항상 ‘도대체 왜?!’, ‘겨우 이런 것에 이렇게 화를 내다니.’라는 생각을 하거나 아이가 이유 없이 화를 낸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사실 벨라가 화가 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바로 이날 아침, 일어나 보니까 벨라의 동생이 벨라의 방에 들어와 벨라의 물건을 핥아먹고 있었거든.

이 모습을 본 벨라는 화가 잔뜩 나. 분명히 방문 앞에 “아기는 들어오지 마”라고 써붙여 놓았는데 동생이 들어왔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런데 ‘난 화가 나기 시작했어’라는 벨라의 말도, 방문 앞에 붙여놓은 경고문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휙 지나가 버릴 수 있는 부분이야. 본다고 해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고. 하지만 벨라에겐 사소한 일이 아니지. 동생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한 벨라는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사사건건 모든 일에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 마트에서도, 길에서도, 발레 학원에서도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완두콩이 뜨겁다고, 목욕물이 차갑다고, 몸이 축축하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말이야.

나는 벨라의 이런 모습들이 너무너무 익숙하게 다가왔는데, 아마 아이들도 이 그림책을 보면 자기 모습 같아서 뜨끔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어. 특히 과자가 부러졌다고 화를 내는 모습에선 꼭 우주를 보는 것 같아서 실소가 나왔어. 현실에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는 몇 번이나 큭큭, 웃었는지 몰라. 어쩜 이렇게 아이들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놓았는지,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니까. 


그런데 아마 이게 내 앞에 닥친 현실이었다면 이미 나는 불 뿜는 용처럼 콧김을 훅훅 내뿜고 있었을 거야.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아이의 말과 행동만 보면서 ‘도대체 왜 갑자기 신발이 신기 싫다는 걸까’, ‘과자가 부러진 게 이렇게 화가 날 일일까’, ‘그냥 가만히 말하면 되는데 왜 소리를 지르는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한테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벨라의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아.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전까지 계속 화를 내며 떼를 쓰는 벨라에게 “누구, 재미있는 이야기 듣고 싶은 사람?” 하고 다정하게 물어. 여전히 부루퉁한 목소리로 “그런 사람 없어요!”라고 화를 내는 벨라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벨라를 꼭 껴안고 벨라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를 읽어주지.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벨라의 마음도 풀린 걸까. 벨라는 엄마에게 말해. 


엄마나 오늘 떼 많이 썼지요미안해요화가 나서 그랬어요.”


사실은 벨라도 알고 있었던 거야. 자기가 했던 모든 행동이 좋은 행동은 아니라는 걸. 자기가 계속 떼를 쓰고 있었다는 걸. 벨라의 엄마는 그런 벨라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줘.


그래우리 모두 이따금 그런 날이 있지하지만 내일은 즐거운 날이 될 거야!”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의 화를 그냥 있는 그대로 안아준다는 거야. 왜 화가 났는지 묻지 않고,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고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다들 그런 날이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게 너무 좋았어. 그동안 아이가 하는 어떤 문제 행동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왜’와 ‘어떻게’에 매달려 있던 내 마음도 위로받는 느낌이었어.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내일은 즐거운 날이 될 거’라는 엄마의 말처럼 하루 종일 즐거운 벨라의 모습을 보여줘. 그 모습을 보면서 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 아이가 천사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벌컥벌컥 화를 내고 또 어떤 날은 너무 의젓해서 다 컸네, 싶다가도 또 어떤 날은 세 살 아기로 돌아간 것 같잖아. 그림책을 보는데 꼭 그런 날들을 보는 것 같았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걸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는데,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하면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니까. 실제로 언제 끝날까 했던 우주의 ‘분노 발작’은 다섯 살이 되면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거든. 

항상 아이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낼 때 ‘도대체 왜’라는 생각에 답답해지곤 했는데 문득 ‘그래,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만으로도 육아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감정’이란 건 정말 어려운 영역이야. 준호가 이제 이전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궁금해한다는 말을 들으니 지금은 ‘화’와 ‘분노’ 같은 감정에 집중되어 있는 고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진다. 점점 더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관계 속에서 아이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키워가게 될까? 정말 육아는 흥미진진한 세계가 분명해.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오고, 끊임없이 나와 타인에 대해 생각하게 하잖아.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나려나! 



22.05.04

그래도 매일, 즐거운 날이 되길 바라며,

다경








지은이 : 레베카 패터슨

옮긴이 : 김경연

현암주니어|2016년

원제 : MY BIG SHOUTING DAY


#감정#화#분노#떼#화나는날#위로#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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