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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딸이 아버지와 친해지는 법

by 김지만



대한민국 50대 남성들의 취미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아버지의 취미는 딱 두 가지다. 첫째,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와 크래커를 먹으면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또는 ‘인생극장’ 유튜브 영상보기. 둘째, 일요일마다 가방 안에 핸드폰, 이어폰, 저혈당 방지용 캔디 한두 개를 담고 집 근처 산책 다녀오기. 집과 일터만 오가던 아버지에게 두 개의 취미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와 두 번째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이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업무로 인해 밤늦게 집에 들어오셨고, 가족들과 많은 추억을 쌓지 못했다. 그 점에 대해 아버지는 두고두고 미안해하셨고, 나는 더 늦기 전에 함께 추억을 만들어가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이 걷는 길을 동행하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제일 많이 다닌 길은 제주도의 이호테우해변을 거쳐 외도, 내도, 하귀까지 이어지는 해안 도로였다. 운전할 때는 몰랐던 논밭, 앙증맞은 카페, 흰 파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짧게는 2시간 길게는 5시간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각자의 핸드폰에 저장된 플레이리스트를 이어폰으로 조용히 듣거나,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버지의 20대, 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이렇게 걷기를 즐겨 하고 건강을 관리하시던 분은 아니었다. 당신은 워커홀릭이었고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음식과 담배로 해소하셨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집안의 가장’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아버지였기에,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열정을 보이며 평일, 주말 상관없이 일터로 나가셨다.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고 나에게도 어쨌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살아오셨기에 당신 덕분에 우리 가족은 부자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가족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생겼다. 2019년 여름과 겨울, 아버지가 2번 쓰러지셨다. 수술을 받고 퇴원하신 후, 한동안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회식이나 동창회 모임 연락도 줄어들었다. 점차 아버지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일을 열심히 해도, 건강한 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도루묵이 되어버린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셨다고 한다. 열정, 최선을 강조하던 과거와 달리 ‘건강한 삶’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마인드로 바뀌셨다. 헬스장 기부천사였고, 누워있는 걸 좋아했던 아버지는 집 근처 3km 거리의 산책길을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처음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건강에 책임감을 느끼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거리와 속도를 늘려갔다. 그렇게 4년이 지났다. 이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에 3만보를 걸어도 체력이 넘치신다.




같이 걷던 나에게도 변화가 생겼을까? 그저 취미를 공유해보려고 시작한 행동인데, 어느새 내가 더 많이 배우고, 먼저 아버지에게 걷자고 얘기할 정도가 되었다. 나에게 일요일 아버지와의 산책 시간은, 금주에 있었던 사건부터 재테크, 사회생활 매너, 시간활용의 중요성 등 여러 주제를 가지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였다.

덕분에 아버지 나이 또래의 어른들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졌고, 1개의 책을 읽어도 생각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리고 건강도 꽤 진지하게 관리했다. 사실 아버지 못지 않게 열정적이던 나는, 몇 번의 번아웃이 있었다. 아버지와 산책을 하면서 일기를 쓰거나 명상을 겸했고, 신체와 정신건강을 돌보기 시작했다. 2년 전에는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운동을 알려주고 싶어서 생활스포츠지도사(보디빌딩)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지금은 제주도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겼다. 저녁 8시쯤 집 근처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한다. 혼자라도 외롭지는 않다. 몸은 멀리 있지만,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은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네 산책하는 것도 버거워하시던 아버지. 최근에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서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보내주셨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롤모델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멋지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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